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손을 잡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장면은 각본 없는 드라마였다. 같은 해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는 북미 정상이 역사상 첫 악수를 했고, 9월 19일에는 문 대통령이 평양과 백두산을 방문했다. 하지만 지난 해 2월 28일 베트남에서 다시 열린 북미 회담이 노딜로 끝나면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냉각기로 빠져들었다.
이에 이제는 청와대를 떠난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당시를 돌이켜보면서 남북 관계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북미 관계를 조율하는 일이 어렵기도 하지만 우리 내부에도 개선할 점이 적지 않다고 털어놨다. 그의 생각은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을 기념해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가 진행한 특별 대담에서 드러났다. 26페이지에 달하는 대담 내용은 지난 22일 발간 된 계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실렸다. 다음은 그 중 일부다.
■2018년 기대에 못 미치는 지금 현실 왜?
임 전 실장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속도를 못 내고 있는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먼저 그는 “하노이 회담이 노딜로 끝난 것이 결정적”이라고 지목했다. 북한으로 하여금 전략적 고민을 다시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남북이 양자 간 합의 사항을 더 적극적으로 실행하지 않았던 게 이유라고 밝혔다. 임 전 실장은 “북미회담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이끄는데 결정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남북이 풀어야 할 문제를 뒤로 미루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해선 안되고 마찬가지로 비중 있게 추진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특히 그는 “두 번째 문제에서는 새로운 결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제사회와 미국의 대북 제재 탓에 운신의 폭이 좁긴 하지만 제제 안에서라도 남북이 할 수 있는 일은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트럼프 때문에 남북관계 안 풀린다?
임 전 실장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높은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임 전 실장은 “미국 전체가 한반도 문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게 더 갑갑한 현실”이라며 “오바마 정부 8년 동안 단 한 번도 한반도 의제를 백악관 테이블에 우선 순위로 올려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임 전 실장은 2018년 4월 남북회담 직전 정의용 안보실장이 백악관을 방문했던 때를 회상했다. 정 실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깜짝 결정에 힘입어 백악관 뜰에서 서훈 국정원장, 조윤제 주미대사를 옆에 두고 북미 회담 소식을 생중계로 전했다. 임 전 실장은 “(당시 백악관) 내부 참모들은 다수가 부정적이었고, 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 문제를 풀도록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내부의 엄청난 반대를 뚫고 뭔가를 만들어보려고 한 점을 평가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잘못이 없다?
한반도 문제에 있어 대미 관계는 늘 중요하다. 임 전 실장의 회상에 따르면 정 실장은 중요한 시기에는 한 달에 20일 이상을 존 볼턴(당시 미 NSC 보좌관)과 통화했다. 볼턴은 북한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대북 강경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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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여름 갑자기 등장한 스티브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복병이었다. 그는 볼턴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대북 온건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임 전 실장은 그가 “꽤 압박을 가했다”고 떠올렸다. 임 전 실장은 “(비건이) 자기가 다시 업무 파악해서 ‘오케이’ 하기 전까지 ‘올 스톱’하라고 했다”며 “우리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당시 우리 정부 내부 반응이었다고 회상했다. 임 전 실장은 “그때 우리 내부의 모습이 우리가 극복해야 할 지점인지도 모르겠다”며 “외교부 스톱, 통일부도 얼음 땡… 청와대에서도 일부는 부담스러워했다”고 밝혔다.
그는 “아무튼 그때 우리 관계 부처들의 모습을 보고는, 남북 간에 뭔가를 밀고 가려면 우리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태도라고 느꼈다”며 “미국에서 우리로 치면 국장급 실장급이 안된다고 하면 우리는 부서 전체가 아무런 결정도 못하는 태도로는 우리가 더 역할을 하기 어렵다”고 재차 지적했다.
■대북 제재 기준은 월경? 이전?
임 전 실장은 “올해도 북미 간에 진전이 없다면 문 대통령은 미국과 충분히 소통하되 일부 부정적 견해가 있어도 일을 만들고 밀고 가려 할 것”이라며 “이 태도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엔 제재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일을 정부 차원에서 해야 한다. 제재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유엔 제재를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임 전 실장은 “미국은 제재의 판정 기준을 월경(越境)으로 적용한다. 물자가 넘어가면 무조건 제재 대상이 아닌가를 판단하고 규제를 하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제재 정신은 그게 아니다. 이전(移轉) 기준이어야 한다”며 “물품을 이전해주면 국제사회 룰을 깨는 것이라 안되지만 단순히 갔다가 오는 걸 제재 대상이라고 볼 것인가. 그러면 아무 것도 못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통일부가 북한 문제를 조율하는 한미워킹그룹에서 빠져야 한다는 입장도 밝혔다. 대북 제재 관련 사안을 조율하는 자리에 통일부가 끼는 건 스스로에 독이 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北 초대형 방사포, 위협? 자강?
임 전 실장은 최근 북한의 초대형 방사포 발사와 청와대의 유감 표명 그리고 이에 대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비난 성명을 언급하면서 “정리가 필요하다”고도 말했다. 임 전 실장은 김 부부장이 “(김여정의 성명은) 당신들은 우리보다 더 하면서 왜 우리가 우리 군사훈련 하는 걸로 감 놔라 배 놔라 하나, 당신들은 군사훈련하고 신무기로 무장하면서 우리는 넋 놓고 있으라는 거냐, 뭐 이런 얘기”라며 “북이 핵무기를 개발하거나 전략 미사일을 실험·생산하는 문제와, 재래식 무기를 개발하면서 훈련하고 시험하는 문제는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그는 “우리도 연중 훈련하고 새 무기를 개발하면서 한 국가로서 안보에 대한 자강 능력을 갖기 위해 노력한다. 다양한 미사일 시험 발사도 하고, 최근엔 신무기도 많이 수입했다”고 말했다. 북한의 초대형 방사포에 대해 자강이라는 입장을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임 전 실장은 청와대를 떠났지만 남북 관계 진전을 위해서는 어떤 역할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당분간은 민간 영역에서 신뢰 관계를 쌓으면서 1.5트랙(반민반관)의 어떤 선에서 정부 간의 소통을 지원하고 민간 분야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라면서도 “정치적 역할이 필요하다면 마다할 생각이 없다”고 여운을 남겼다.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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