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을 넘어 ‘창직 하는 사람(Job Creator)’들이 늘고 있다. 끊임없는 세상의 변화와 새로운 것들이 넘쳐나는 시대, 회사에서 찾지 못한 직업 정체성에 대한 숙제를 개인들이 스스로 고민해 찾게 된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의 직업을 새롭게 정의내리기 시작했다.
‘원부연의 직업의 탄생’은 스스로 창직을 한, 나만의 단어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개인과 산업 두 영역에서 새로운 화두를 제시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두 번째 커리어를 꿈꾸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인사이트를 전하고자 한다.
숫자와 분석을 좋아하던 그는 통계학 전공을 선택했지만 그 곳에서의 공부는 왠지 답답하고 재미가 없었다. 국내 대학 중퇴 후, UC 버클리에서 비즈니스 전공으로 새로운 길을 시작한다. 동시에 좋아하던 스포츠 관련 일을 찾다 대학 농구 팀에서 데이터 분석 일을 맡게 된다.
데이터 분석가가 팀에서 신뢰를 쌓으려면 숫자가 아닌 필드 선수들과의 호흡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선수들의 연습을 돕고 물 한잔까지 살뜰히 챙겨주며 소통 한 덕에 팀에서의 좋은 역량을 쌓을 수 있었다. 그들의 추천으로 그는 ‘LA 레이커스’행 티켓을 거머쥘 수 있었다.
매직 존슨 사장이 있던 ‘LA 레이커스’에 데이터 분석가로 활약하게 된 김재엽씨. 그는 한국인 최초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곳도 하나의 회사일 뿐이었다.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며 과감히 레이커스를 퇴사, 새로운 도전을 나섰다.
- 어렸을 때부터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나?
“고등학생 시절부터 좋아했다. 그 당시 박지성 선수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이 계기였다. 다른 축구팬들처럼 나 역시 그 때부터 해외 축구에 관심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축구감독이 되고 싶다는 나름의 꿈도 생겼다.”
- 경기 분석하고 전술 짜는 걸 좋아했다고?
“나는 원래 분석하는 걸 좋아하던 사람이다. 현상을 보고 분석하며 숨은 의미를 찾아내는 걸 즐겼다. 특히 축구 보며 혼자 전술 짜고 분석하는 게 취미기도 했고. 선수 경험도 없었고, 감독이 되기 위한 정식 지도자 코스를 생각한 것도 아니었지만 나름 열망이 있었던 것 같다.”
- 선수 출신이 아니어도 감독이 될 수 있는지?
“사실 프로 선수 출신이 아닌 분들 중 내가 존경하는 몇 감독님이 계셨다. 미국 유학 가 있을 때 존경하던 그 감독님들이 내가 공부하는 지역으로 전지훈련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너무 흥분하는 마음에 잠깐이라도 보고자 차까지 구입했다.”
- 결국 만나긴 했나? 어떤 감독님들인가?
“감독님께 드릴 나만의 전략 분석 보고서를 작성해 어떻게든 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열심히 따라다보니 우연치 않게 만날 기회들이 생겼다.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일분 정도 만난 식이었는데 그 짧은 순간에 내 의도를 설명하고 자료를 드렸다. 조제 무리뉴 감독과 안드레 빌라스 보아스 감독이다.”
- 혹시나 연락이 왔는지?
“답이 오진 않았다. (웃음) 사실 내가 작성한 보고서를 봤을지도 의문이고. 두 감독을 존경한 이유는 둘 다 프로 스포츠 선수 경력이 없다는 지점이었다. 전략과 분석에 능해 지금의 자리에 앉은 분들이었기에 나에게는 엄청난 롤모델일 수밖에 없었다.”
- 대학 때 전공은 무엇이었나?
“분석하고 숫자 보는걸 좋아했던지라 통계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그런데 학교 공부가 너무 재미없었다. 그래서 나 혼자 숫자 보며 이런저런 분석들을 했던 것 같다. 당시만 해도 통계 분석 툴이 다양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유학을 간 후에야 이런 저런 툴을 공부할 수 있었다.”
- 일단 무작정 미국으로 갔다.
“무작정 미국으로 가 어학연수부터 시작했다. 공부를 하며 미국 대학에 다시 지원했고, UC 버클리 대학에 합격했다. 해외 경험이 전혀 없던 초반에는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다. 특히 영어로 이야기하는 게 부담이 컸다.”
- 영어에 익숙해지기 위한 노하우가 있었다고?
“원체 일 벌리는 거 좋아하던 성격 때문에 가자마자 이런저런 단체들을 만들었다. 유니세프 지역 부서를 만들어서 활동하는 등 그때 그때 재미있어 보이는 것들을 했다. 단체를 리딩하면서 영어가 많이 늘었다. 어찌됐든 소통을 해야 하니까 어떻게든 표현하게 되더라.”
- UC 버클리를 선택한 이유는?
“사실 몇 군데 합격한 상황이었다. UC 버클리 비즈니스 스쿨(HAAS)이 굉장히 유명했기에 학사 과정도 매력적이었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학교라는 것도, 스포츠 팀이 꽤 유명하다는 것도 선택의 큰 이유가 됐다.”
- 대학 스포츠팀에 합류하기 까지 과정은?
“UC 버클리 스포츠팀에 어떻게든 기여하고 싶었다. 그런데 등용문 자체가 너무 높더라. 미국 스포츠의 위상이 어마어마한지라 엄청난 학위를 가진 사람들도 연봉을 포기해서라도 일하려고 몰려드는 곳이다. 그래서 네트워킹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사람 뽑을 때도 추천을 통해 들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대학 스포츠팀, 프로 스포츠팀 할 것 없이 그렇다. 그래서 어떤 곳이든 들어갈 수만 있다면 종목 상관없이 경험 하고 싶었다.”
- 일단 미식 축구 팀 데이터 분석가로 들어갔다.
“당시 스포츠 매니지먼트라는 수업이 있었다. 거기 가르치던 강사님이 UC 버클리 대학 스포츠 부서의 장이었다. 한 해 예산만 1천억이 넘는 규모를 운영하는 곳이다. 당시 그 분 프로젝트를 이것저것 도와드리면서 자연스레 내 이야기를 전하게 되었다. 그 분 소개로 UC 버클리 미식축구 팀에서 인턴을 하게 되었다.”
- 대학 스포츠 팀에 인턴이라는 직위가 있나?
“사실 인턴이라는 직위 자체는 없었다. 그냥 데이터 분석 일을 한 거였고 그들이 보기엔 특별한 타이틀 없이 ‘데이터 분석 하는 애’ 정도였다. 학생 시절 보수 없이 일한거라 인턴 직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 데이터 분석이 쉽지 않았다고?
“아메리칸 풋볼, 즉 미식축구라는 종목 자체가 데이터 분석이 가장 어렵다. 스포츠로 치면 야구가 가장 쉽고, 농구가 중간, 미식축구가 접목이 어려운 순이다. 22명이 동시에 몸을 부딪히며 움직이기에 신체가 충돌하는 순간들이 중요한 자료인데, 그걸 데이터로 정리하기 어렵다. (야구는 선수들의 움직임이 적고 신체가 닿지 않는다. 공을 던지고 친다는 것이 하나의 독립된 사건이라 통계를 내기 쉽다.) 그래서 미식축구팀은 내가 이야기하는 통계나 숫자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그 때 농구팀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농구팀으로는 어떻게 가게 됐나?
“지인의 소개로 농구팀 코치를 만났고 하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때마침 당시 농구 코치님도 데이터 분석에 관심이 있었고. 당시 NBA 에서는 꽤 활성화 되었지만 대학 농구는 적용사례가 거의 없었다. 일단 해보자고 말씀을 하셔서 시작하게 되었다. 졸업 후에는 급여도 받았다.”
- 데이터 분석 공부는 어떻게 했나?
“그 전까지는 좋아서 이런 저런 것들을 혼자 공부해온 게 전부였다. UC 버클리 입학 후 스포츠팀에 들어가기 전에는 다양한 통계 분석 툴들을 독학으로 하나 둘 학습했다.”
- 당시 UC 버클리 농구팀이 주목 받던 시기라고?
“그렇다. 운이 굉장히 좋았다. UC 버클리 농구팀은 리그는 좋지만 명문 팀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들어갔을 때 농구 유망주들이 많이 들어왔다. 선발 선수 5명 중 4명이 NBA로 갔으니까. 전국방송도 탔고 그 때 나 역시 언론에 노출이 됐다. 당시 코치님의 배려로 경기 중 코치 좌석에 앉을 수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몇 관계자 분들이 독특하게 기억해줬다.”
- NBA 관계자들과 조금씩 네트워킹을 쌓아갔다.
“‘빌 월튼’이라고 전 LA 레이커스 감독이었던 ‘루크 월튼’의 아버지가 당시 경기 중계를 하셨다. 그 분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며 알게 되었다. 몇 번 언론에 소개 된 후 더 많은 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워낙 내가 의사 표현을 공격적으로, 지르는 스타일인데 그런 나의 방식을 호기롭게 봐 주셨던 것 같다.”
- 가장 중요한 건 ‘신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결국 다 신뢰의 문제라는 걸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깨우친 거 같다. 나 역시 선수 경험이 없기에 늘 외부자의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것 같고. 처음 UC 버클리 농구팀에 들어갔을 때 넘치는 의욕으로 15장 보고서를 썼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었고 내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서. 코치 자리에 두고 왔는데 얼마 후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사실을 알았다.”
- 왜 보고서를 읽지 않았을까?
“감독 입장에서는 바쁜 일정에 숫자들이 적힌 리포트를 보는 게 우선순위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분석 인사이트가 그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더 깊이 소통하고자 필드에 나가기 시작했다. 필드에서 직접 뛰는 선수와 숫자로 이야기하기 전 관계를 쌓아가는 시간이 필요했다.”
- 어떤 노력들을 시작했나?
“내 분석과 전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려면 선수들과 호흡 하며 친해져야했다. 그래서 선수들 연습할 때 공도 던져주고 물도 가져다 주고 마사지도 해주고 밥도 같이 먹어가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서로의 이야기를 듣게 되더라. 이후에는 리포트도 읽기 편하게 요점만 간단히 한두장으로 짧게 정리 했다.”
- 농구에서 데이터 분석가의 역할과 위상은?
“내가 활동하던 2017년 전후는 데이터 분석가라는 직업으로 치면 1.5세대 정도다. NBA에도 일부 팀에는 분석가 자체가 없는 곳도 있었고. 이제는 매우 중요한 부서로 자리 잡았다. 물론 아직까지 선수들은 코트에서 뛰는 사람이다 보니까 분석에 대한 공감이 적은 편이다.”
- 프로 농구 팀, NBA로의 취직 과정은 어땠나?
“일단 공채가 없다보니 인터뷰 할 기회부터 잡아야했다. 특히 프로 스포츠 팀의 경우 사람을 잘 안 뽑는다. 내가 있던 스포츠 오퍼레이션 부서는 규모도 적은데다 특히 더 잘 안 뽑았고. 그런데 프로팀이란 결국 대학팀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기에 당시 대학 코치님들에게 일단 부탁을 하게 되었다.”
- 정보와 네트워킹의 영향력이 큰 것 같다.
“그렇다. 사실 구단들이 채용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자리가 있는지도 모르고, 프로에 아는 분도 잘 없는 상황이라 일단 대학 코치님들께 담당자를 소개 받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LA 레이커스 코치님을 알게 되었고 채용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마침 채용을 한다고 했다.”
- 그 외 어떤 팀들과 인터뷰 했나?
“LA 레이커스를 비롯, LA 클리퍼스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도 인터뷰를 했다.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는 워낙 인기 절정의 팀이었고 구단주 아들과 이야기 할 기회도 얻었지만 채용 계획이 없었다. 결국 가장 먼저 연락이 온 LA 레이커스와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연락 오자마자 샌프란시스코에서 LA로 달려갔다. 오라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여야 하는 곳이다.”
- 서부 쪽 구단만을 선호했는지?
“절대 아니다. 사실 NBA는 전 세계에 30개 팀이 전부이지 않나. 자리가 있으면 무조건 가야 한다. 다행히 가까운 지역이 돼 운이 좋았을 뿐이다.”
- 대학 농구와 프로 농구의 차이점은?
“대학은 감독이 최고지만 프로는 사장이나 구단주가 우선이다. 감독과의 역할도 엄격히 구분되어 있고. 대학 때는 선수들과 호흡하는 게 가능했다면 프로는 그게 허용되지 않는다. 선수와 데이터 분석가가 같은 코트에 서는 걸 금기시한다. 대학 시절에는 감독이 상사였다면 프로에서는 단장이나 사장이 나의 상사였다.”
- 들어가자마자 조직이 혼란스러웠다고?
“당시 나를 뽑았던 분은 미치 컵첵이라는 단장이었다. 그런데 내가 들어간 후 1년도 안 되어 단장이 바뀌었고 당시 구단에 변화가 많았다. 이후 구단주의 결정으로 매직 존슨이 사장으로 들어왔다. 그 때 내 위의 팀장도 회사를 나가게 되면서 얼떨결에 부서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직접 매직 존슨 사장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
- 일하면서 가장 좋았던 지점은?
“미국은 원하는 것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사실 나처럼 공격적인 성향의 사람도 잘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이고. 하지만 결국 리더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건 사실이다. 매직 존슨 사장과는 잘 맞았지만 또 안 맞는 분도 있었다. 하지만 다양한 리더들을 경험했다는 건 정말 큰 자산이었다.”
- 연봉은 어느 정도 받았나?
“수당 까지 합쳐 1억 조금 안 되는 정도였다. 2016-17 시즌과 2017-18 두 시즌을 함께했다.”
- 2년 만에 그만 둔 까닭은?
“사실 모든 게 다 좋았다. 일 자체도 재미있었고. 꿈의 직업이자 미국에 온 큰 이유기도 했는데 운 좋게 전부 성취했으니까. 게다가 부서 책임자 역할까지 했고. 권한이나 업무 패턴도 자유로웠다. 그런데 직장인이라는 한계에 스스로 부딪혔던 것 같다. 피고용인의 입장이 되면 시간과 공간을 통제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 지점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 특히 어떤 지점에서 고민이 많았나?
“연봉과 권한이 올라가도 피고용인의 입장이라면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윗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지점들이 많았다. 당시 모시던 NBA 단장님 연봉이 대략 60억, 대학 농구 감독님이 30억 정도였다. 연봉 뿐 아니라 사회적 위치까지 대단한 사람들인데 늘 불안해한다. 스포츠라는 게 승패로 증명되는 곳이다 보니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 하루아침에 사람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 인생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고민했다고?
“내 브랜드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다. 여기서 운이 너무 좋아 혹시나 단장이 된다 해도 어차피 구단주 눈치를 봐야하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팀 내 정치도 극심하다. 데이터를 통해 저평가된 선수를 발견하고, 스포츠의 오랜 편견들을 극복해보겠다는 의지는, 생각보다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음을 느꼈다.”
- 2년의 커리어, 아쉽다는 생각도 든다.
“2년 만에 그만둔 걸 보고 아깝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었다. 누군가 봤을 때 비효율적인 선택일 수도 있고. 그런데 내 생각은 달랐다. 그런 이유로 이 회사에 1~2년 더 있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경험에서 의미 있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 퇴사 후 첫 행보는 무엇이었나?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다. 피고용인이 아닌, 시간과 공간의 주체가 되려면 구단주처럼 자본가가 되거나 내 브랜드를 만들어야 했다. 그만큼의 자본은 아직 없으니 후자를 선택했다. 원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끊임없이 분석하고 체크하던 게 나의 일상이기도 했고. 유튜브라는 채널을 활용하기는 했지만 크리에이터 보다는 개인 브랜드 구축에 관심이 있었다.”
- 어떤 주제의 채널인가?
“한국에 관심 있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다양한 이슈들을 영어로 이야기해주는 채널이다. 문화 예술 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 이슈도 전하고 있다. 한국 남자의 시선으로 한국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했다.”
- 한국을 소개하기로 한 계기는?
“찾아보니 한국 이야기를 하는 유튜버 중 한국 사람이 별로 없었다. 대체로 외국인의 한국 생활기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한국 사람이 안 한다는 게 신선한 지점이었다. 내 시각으로 한국 이야기를 영어로 전해주면 더 많은 공감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 미국에 살면서 느낀 지점이 컸다고?
“미국에 7년 이방인으로 살면서 문화의 가치나 다양성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리고 미국에 있다 보니 ‘한국 문화’, ‘한국 남자’라는 브랜드가 엄청나게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 시점에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한국 남자의 시선으로, 또 영어로 이야기 해주면 좋겠다고 판단했다. 덕분에 10개월 만에 30만 구독자가 생겼다. 사실 하는 이야기들은 유학 시절 외국인 친구들이 궁금해 하던 것들이 대부분이다.”××
- 퇴사 후 수입은 어떤가?
“사실 수입에 대해 많이 물어보는데 이야기하기 복잡한 부분이 많다. 유튜브 수입은 국적별 연령별 변수가 너무나 많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재테크에 대한 관심이 꽤 많다. 미국 갈 때쯤 투자 등 자산 관리도 꼼꼼히 하고 있던 편이라 이제는 회사를 다니지 않아도 먹고 살만큼의 수익은 나는 상황이다. 투자를 시작한 것도 자본주의에 대한 공부와 연구, 분석에서 시작했다.”
- 개인 브랜드의 성장, 어디까지가 목표일까?
“앞서 말씀드렸듯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가 되거나 개인 브랜드를 쌓아야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 사실 개인 브랜드는 나영석 피디만큼 인지도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본가로 가기 위한 창업도 준비 중이다.”
- 어떤 아이템으로 창업을 준비중인가?
“뷰티 플랫폼으로 미국인들을 타깃으로 한다. 미국에서 런칭 할 예정이다. 미국 뷰티 브랜드들과 소비자들을 연결해주는 커머스 플랫폼이다.”
- 화장품을 선택한 이유는?
“화장품 카테고리를 선택한 것도 전략적이었다. 미국이 뭐든 최강자 같지만 몇 가지 취약한 분야가 있다. 의료나 온라인 커머스 분야기 그렇다. 미국의 온라인 뷰티 커머스는 뒤쳐진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 솔루션을 플랫폼을 만드는 걸로 해결하고 싶었다.”
- 미국에서 법인을 만드는건가?
“일단 한국에서 만든 후 추후 미국 법인을 만들 생각이다. 온라인 플랫폼이기 때문에 미국 타깃이긴 하지만 아직까진 한국에서 일해도 큰 문제가 없는 시점이다. 두 달 안에 오픈 예정이다.”
- 직원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현재 5명의 직원들이 있다. 초기 자본은 개인 자금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곧 시드 투자를 받기로 이야기가 된 상황이다.”
- 앞으로도 하고 싶은게 많을 것 같다.
“하고 싶은 건 너무 많지만 당분간 창업에 집중하려고 한다. 요즘 미국 시간에 맞춰 일하다보니 낮과 밤이 꽤나 바뀌어 남들과는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침 6시에 자 오후 1시경 일어나는 일정이다.”
- 딱히 취미가 없다고?
“음주가무는 일절 안한다. 관심도 없고 재미도 없다. 그냥 움직이는 일상의 시간에서 나는 늘 읽고 분석하고 생각한다. 그게 나에게는 가장 큰 재미 요소다. 하루의 시작을 각종 차트를 보며 통계와 함께한다. 사실 요즘 트렌드나 소위 감성과 잘 맞는 사람은 아니다.”
- 많은 일을 해왔지만, 결국 통하는 지점이 있다면?
“시장에서 통할만한 일인가가 중요하다. 흔히 말하는 열정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라도 분석해보고 시장의 반응을 봤는데 아니라고 판단된다면 과감하게 버린다. 시장에 내가 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만 움직인다. 아니라면 애초에 시작도 않는다.”
- 일에 대한 김재엽의 지향점은?
“개인적인 선호나 취향은 생각보다 쉽게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뭘 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기회를 찾고 내가 줄 수 있는 가치를 발견한다면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다. 내 분석과 가설이 시장에서 먹히는지 검증하는 과정을 너무나 좋아한다. 그 과정은 내가 선택한 것이니, 궁극적으로 내 시간과 공간을 온전히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버둥거린다 정도라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웃음)”
원부연. 서울경제신문 라이프점프 객원기자. 전 광고 기획자에서 음주문화공간 기획자로 창직 후 술집, 극장, 살롱 등 서로 다른 9개의 공간을 런칭했다. <합니다, 독립술집>, <회사 다닐 때보다 괜찮습니다.>, <퇴사 말고, 사이드잡> 세 권의 책을 쓴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원부연 객원기자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