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 마지막회에는 덕선이네가 판교로 이사를 가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덕선이네가 판교로 간다고 하자 이삿짐센터 직원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 농사지으러 가는 거냐고 묻는다. 실제 지금은 시대의 변화를 이끄는 정보기술(IT) 기업들이 몰려 있는 판교지만 20년 전만 하더라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판교는 논밭이 있고 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농촌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판교는 지난 1975년 남단녹지로 지정된 후 개발제한구역에 준하는 관리를 받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 1기 신도시인 분당을 개발할 때도 판교는 남겨 놓았다. 판교 개발 얘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건 1990년대다. 1998년 5월 성남도시기본계획이 승인되면서 판교 지역이 개발예정용지가 됐다. 이어 성남시는 1999년 국토연구원에 의뢰해 ‘판교개발 기본구상’을 연구하면서 판교 개발 방안을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수도권 난개발을 방지하고 수도권 남부 주택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대규모 택지 개발이 추진되면서 판교가 후보지로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2003년 첫삽 뜬 후 주거·산업 본격 개발
벤처 중심 동남부 업무 핵심 기대했지만
금융위기 덮쳐 공모형 PF 사업 올스톱
판교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IT다. 판교는 애초부터 1기 신도시의 실패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자족 기능을 갖춘 도시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판교 이전에 조성된 1기 신도시의 경우 주택공급에 우선순위를 두고 추진되는 바람에 자족성 확보가 미흡해 ‘베드타운’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2003년에 수립된 기본 개발목표에도 ‘수도권의 택지난 해소를 위한 신주거 단지 조성’과 함께 ‘산업기반제고를 위한 도시지원시설 조성’이 들어 있다. 특히 벤처업무 기능을 중심으로 수도권 동남부의 업무 거점 역할을 기대하며 조성됐다. 서울 업무지구의 이전 가능성도 높은 지역으로 평가됐다. 서울 중심에서 20㎞, 강남에서 10㎞ 떨어진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판교는 2기 신도시 중에서도 가장 큰 주목을 받았다. 실제 2006년 판교에서 처음으로 공동주택분양이 실시될 당시 ‘로또 분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분양만 받으면 곧바로 1억원 이상의 차익을 남길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이에 당시 투기수요 차단 등을 위해 처음으로 인터넷 분양과 사이버 모델하우스가 도입되기도 했다.
다만 초기에는 우려도 있었다. 판교 개발 사업의 시행자인 경기도·성남시·대한주택공사·한국토지공사 등이 2003년 4월에 진행한 ‘성남판교지구 택지개발사업 기본구상 및 개발수요 분석 연구’ 회의록을 보면 당시 참여한 한 교수는 “판교 업무지구 벤처단지도 분당과 같은 전철을 밟을 것”이라며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 심지어 아예 벤처 경쟁력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실제 IT 기업들의 반응도 미적지근했다. 2003년 1월 기업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판교 지구에 대한 선호도는 7.3%에 불과했으며 IT 기업보다 건설업체들의 선호도가 더 높았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판교는 IT 기업들이 몰려들면서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됐다. 판교에 IT 기업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기 시작한 건 2010년 이후다. 카카오가 2012년 강남에서 판교로 본사를 옮겼고 엔씨소프트와 넥슨은 2013년 강남에서 판교로 왔다. 또 같은 해 네오위즈게임즈는 분당에서 판교로 이전했으며, 분당에 본사를 둔 네이버도 직원 수가 늘어나면서 판교로 사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6월 현재 시가총액 상위 20위 안에 네이버·카카오·엔씨소프트 등 판교에 자리 잡고 있는 IT 기업 3곳이 들어 있다. 10년 전인 2010년 6월 당시에는 시총 20위 내에 IT 기업이 단 한 곳도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 수준의 변화다. 카카오는 최근 한국을 대표하는 제조업체인 현대자동차의 시가총액을 추월하기도 했다. 카카오 직원 수는 2012년 판교 이전 당시 200명 남짓이었으나 지금은 계열사를 포함해 9,000여명으로 늘었다.
IT 기업들의 고성장세가 지속되면서 판교 오피스 시장에도 훈풍이 불고 있다. IT 기업들의 덩치가 갈수록 커지면서 판교는 현재 공실률이 제로에 가까워 빈 사무실을 찾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공간이 부족해 여러 개 건물에 나눠 입주한 기업들도 많다. 이처럼 판교가 초기 우려와 달리 자족 기능을 갖춘 도시로 성공적으로 자리 잡으면서 한국 신도시 개발의 역사는 판교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판교 일대 유일한 지하철역인 판교역을 끼고 추진되는 대규모 개발사업 ‘알파돔시티’ 프로젝트 완공도 판교의 풍경을 바꾸는 거대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 판교는 허브 역할을 하는 곳이 없었다. 판교를 지나는 유일한 지하철역인 판교역이 있지만 역세권 개발이 마무리되지 않아 역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IT 기업들이 몰려 있었다. 알파돔시티가 최종 준공되면 판교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허브가 형성될 것으로 예상된다.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알파돔시티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에 마지막으로 추진됐던 공모형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이다. 공모형PF 사업의 목적은 원래 거주민이 들어오기 전 편의시설을 만드는 것이다. 다만 애초 분양형 사업으로 추진하다 보니 사업을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 곳도 없고 주민들이 들어오기도 전에 분양을 하려다 보니 상권 활성화에 대한 우려도 있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알파돔 프로젝트’ 등 포기않고 재추진
블록별 매각 속도내자 투자자들 북적
관련기사
IT기업 속속 몰리며 자족 도시로 우뚝
제2·3테크노밸리 완공땐 수도권 거점 도약
실제 알파돔시티뿐만 아니라 2005~2007년에 진행된 29개의 공모형PF 사업이 모두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출자자가 너무 많은 것도 문제였다. 시행사인 알파돔시티 프로젝트금융투자회사(PFV)에는 2007년 말 설립 당시 최대 출자자인 지방행정공제회(25%)를 포함해 한국토지주택공사(19%), 롯데건설(11.5%), 산업은행(4%), 단호학원(3%) 등 전략적투자자(SI)와 재무적투자자(FI), 건설사(CI) 등 무려 17개 기관이 참여했다. 그러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격탄까지 맞는 바람에 사업이 완전히 멈췄다.
그랬던 프로젝트에 다시 희망이 살아난 게 2011년이다. 당시 행정공제회에서 알파돔시티 PFV 대표로 박응한 개발사업본부장을 선임하면서부터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알파돔시티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됐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사실상 사업을 정리하는 수순을 밟고 있던 골칫덩이였다. 실제 박 본부장이 알파돔시티 PFV 대표로 취임했던 2011년 3월 당시 알파돔시티 10개 블록은 단 하나도 착공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박 본부장은 “자본금 4,600억원을 거의 다 소진하고 중도금은 연체돼 있었다”며 “건설사도 모두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고, 이사회를 갔는데 모두 패배주의에 젖어 서로 책임공방만 벌이고 있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말했다. 그는 “도저히 사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어떻게 사업을 접을지만 고민하고 있었다”며 “출자사들도 사업을 정리할 사람들을 이사로 보내다 보니 개발 사업에 대한 이해도도 떨어졌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박 본부장의 생각은 달랐다. 매몰 비용과 향후 가치 상승을 따져보니 프로젝트를 끌고 가는 게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건설사들을 설득하기 위해 1단계로 6-3블록은 행정공제회, 6-4블록은 LH가 건물을 선매입하고, 7-2블록 땅은 현대백화점에 매각해 자금을 마련했다. 공사비가 마련되자 시공사들도 생각을 돌렸다. 1단계 이후 2단계부터는 사업 추진 의지가 약한 건설사들을 내보내고 나머지 부지는 외부 투자자를 유치해 사업을 진행시켰다. 특히 그동안 주로 서울 3대 오피스 권역(도심·여의도·강남)에 투자했던 국내외 기관투자가들의 경쟁이 치열했다. 한국 상업용 부동산 시장의 큰손인 싱가포르투자청(GIC)을 비롯해 아센다스·ARA·M&G·신한금융그룹·미래에셋대우 등 국내외 유수의 기관투자가들이 뛰어들었다. 그만큼 판교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것이다. 특히 판교 테크노밸리가 조성된 지 10년이 지나면서 전매 제한이 풀리고 있어 향후 판교 오피스 시장에 대한 큰손들의 투자는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알파돔시티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IT 기업들도 판교역으로 몰려들고 있다. 카카오가 행정공제회가 투자한 6-1블록을 전부 사용하기로 했으며 네이버는 미래에셋대우가 투자한 6-2블록을 임차하기로 했다. 아울러 엔씨소프트는 ARA가 투자한 알파리움타워 한 동을 임차하기 위해 협상을 진행하고 있으며 기존 사옥보다 판교역에 더 가까운 판교구청 예정부지에 새 사옥을 짓기 위해 사업의향서를 제출했다. 알파돔시티는 그간 우여곡절을 겪으며 애초 준공 예정 시기보다 8년이 늦어졌지만 사업이 완료되는 오는 2022년 초에는 명실상부 판교를 대표하는 중심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판교에 대한 관심이 워낙 뜨겁다 보니 불이익을 받는 경우도 있다. 판교는 애초 2018년 국토교통부가 선정한 스마트시티 시범 사업지로 선정되는 것이 유력했으나 최종적으로 제외됐다. 스마트시티까지 선정되면 아파트 가격 상승을 더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교의 가치는 앞으로 더욱 올라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2022년까지 조성되는 제2 판교테크노밸리와 2025년까지 조성되는 제3 판교테크노밸리까지 마무리되면 판교는 그 어떤 지역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희소가치를 지닐 것으로 예상된다. 박 본부장은 “지금까지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메트로폴리탄의 중심은 강남이었지만 동탄과 수원 화성 등 수도권 남부 지역에 엄청난 인구가 몰리면서 메트로폴리탄의 중심이 점점 내려가고 있고 그게 판교”라며 “제2·3 테크노밸리까지 조성되면 양재·수서와도 연결되기 때문에 판교가 명실상부 수도권의 중심지로 확고하게 자리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판교=고병기기자 staytomorrow@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