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에 닿지 않는 단정한 머리, 세련된 옷차림, 논리정연하고 스타카토 가득한 말투. 데뷔 36년차 베테랑 배우 배종옥이 그간 주로 맡아온 역할의 특징이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동공의 초점은 풀렸고, 얼굴엔 질곡의 세월을 말해주는 잡티와 주름이 가득하다. 흰 머리는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고, 바짝 말라 갈라진 입술 사이로 종종 험한 말도 나온다. 오는 10일 개봉하는 영화 ‘결백’에서 그가 맡은 역할이 그렇다. 시골 마을 농약 막걸리 사건의 살인 용의자로 몰린 치매 노인 채화자로 분했다.
‘차도녀’ 1세대 격인 그녀가 왜 이런 역을 선뜻 나서 맡았을까. 답은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도전이다. 하지만 도전이라는 한 단어로만 설명하기엔 다소 부족하다.
이에 배종옥은 최근 서울 종로의 한 카페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이번 역할과 연기 인생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풀어냈다. 1985년 데뷔 후 드라마 세트장은 물론 연극 무대, 영화 촬영 현장에서 연기 경험을 쌓을 만큼 쌓았지만 여전히 새로운 길을 원한다고 했다.
배종옥은 “어쩌면 남들은 별 역할을 다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며 “하지만 배우는 늘 작품이나 역할에 대한 갈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전 축구 국가대표 감독 거스 히딩크의 명언 ‘나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I’m still hungry)’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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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채화자는 배종옥이 그간 맡았던 역할 중 가장 볼품 없고, 나이도 가장 많다. 촬영 전 특수 분장에만 두 세 시간씩 걸렸다. 치매 노인 연기 자체도 쉽지 않았다. 살아온 세월의 한이 겹겹이 쌓여 있는데 갑자기 두뇌 회로가 엉켜 버린 캐릭터였다. 치매로 감정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고, 기억의 시계가 과거와 현재를 맥락 없이 오고 가는 인물이었다.
교단에서 연기 지망생들을 가르치기까지 한 베테랑 연기자이지만, 말 그대로 도전적인 상황에 부딪힌 것이다. 배종옥은 “보통 현장에서 모니터를 잘 안보는 편인데 이번에는 정말 많이 봤다”며 “계산도 했고 감정도 알겠는데 쉽지 않았다. 계속 체크를 했다”고 회상했다. 결국 그는 채화자라는 인물을 이해를 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어느 순간 채화자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배종옥은 “이해하는 만큼 인생을 산다고 하지 않나. 연기도 그렇다고 생각한다”며 “그 인물을 이해하는 만큼 연기를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해하는 만큼 인생을 산다, 연기도 그렇다. |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장르로는 로맨틱 코미디를 꼽았다. 가볍게 터치하면서 깊은 울림을 주는 역할에 대한 갈망이다. 나이가 들수록 여배우에게 주어지는 역할의 범위가 좁아지는 현실이 다소 우려되기는 하지만 요즘 영화계의 변화가 고무적이라고 기대했다. 배종옥은 “최근 영화계에서 여성 감독의 영역이 늘어나고 있다”며 “그래서 역할 다양화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사진제공=키다리이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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