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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흑인 골퍼’입니다

플로이드 사건으로 돌아본 ‘백인의 스포츠’ 골프

PGA 투어 바너 “일차원적 사고의 함정 넘어야”

장타 전문 앨런 “인종혐오 편지에 범죄자 취급까지”

1899년 나무 골프 티 발명자는 흑인 의사 그랜트

우즈도 인종적 조롱받았지만 기량·기록으로 극복

2009년 WGC 브리지스톤 인비테이셔널 연습 라운드에서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는 타이거 우즈(왼쪽)와 찰리 시포드. /출처=PGA




8일(현지시간) 조지 플로이드 추도식 현장. /휴스턴=AP연합뉴스


지난달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에 따른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사건은 골프계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때 흑인 차별 문제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던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는 트위터를 통해 “이 충격적인 비극은 공권력이 선을 넘은 데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건설적이고 진실한 대화로 사회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의 극소수 흑인 선수 중 한 명인 해럴드 바너 3세도 “편협한 시각은 삶을 단순하게 바라보게 하지만 삶은 사실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인생에는 객관적인 진리라는 게 있다”며 “차별 철폐를 기치로 뭉치면 일차원적 사고의 함정을 넘어설 수 있다. 차별이 사라지고 정의가 살아 숨 쉬는 사회가 오기를 기도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이 모나한 PGA 투어 커미셔너는 인종차별 항의 시위가 격화하자마자 “성급한 대책 찾기보다 긴 호흡으로 투어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고 싶다”며 의견 청취부터 시작했다. “일단 우리 선수들과 동료들의 얘기를 듣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겠다”던 모나한은 바너 3세와 공개적인 대화 시간을 가진 뒤 성명을 통해 “소통하면서 답을 찾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모리스 앨런. /출처=볼빅


일률적인 구호나 일시적인 행동만으로는 인종차별을 근절하기 힘들다는 의견도 있다. 미국 사회 곳곳에 자리 잡은 차별의 문화가 생각보다 훨씬 뿌리 깊다는 회의적인 증언들이다. 그중 하나는 지난해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대회에도 참가했던 모리스 앨런의 입을 통해 나왔다. 장타 이벤트 전문 선수인 앨런은 최근 미국 골프다이제스트를 통해 “나는 월드 롱드라이브 챔피언십의 유일한 흑인이다. 다른 참가자의 가족으로부터 노골적으로 인종적 비난을 받는가 하면 나를 ‘장고’라 부르는 혐오 편지도 받았다”면서 “작년에는 라이벌 선수의 부친이 소셜미디어에서 나를 범죄자라고 덮어놓고 몰아붙인 일이 있었는데 나는 감옥에서 하룻밤도 보낸 적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스포츠계의 다양성에 대한 컨퍼런스에 초청받아 단상에 선 적이 있다. 사람들은 감동받은 듯 내게 다가와 감사하다고, 멋진 연설이었다고, 도움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때뿐”이었다며 우즈의 성공 이후에도 흑인의 골프계 참여율이 높아지지 않았다는 점도 강조했다. 2018년 월드 롱드라이브 챔피언십 우승자인 앨런은 지난해 한국을 방문해 장타왕 상금 500만원을 가져가기도 했다. 과거 그가 찍은 볼 스피드 211마일은 이 부문 기네스 세계기록으로 남아있다.
우즈와 우즈 이전의 개척자들
골프는 대표적인 백인의 스포츠였다. 최고 메이저대회 마스터스 대회장으로 유명한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이 흑인 회원을 처음 받아들인 게 불과 30년 전(1990년 사업가 론 타운센드)이다. PGA가 흑인 여성을 회원으로 받아들인 것은 24년 전(1996년 르네 파월)의 일이다. 하지만 18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무로 만든 티를 발명한 사람은 다름 아닌 흑인(보스턴의 의사였던 조지 그랜트)이었다.

그보다 더 앞선 1896년에 아버지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고 어머니가 시네콕 인디언인 존 시펀은 제2회 US 오픈에 참가했다. 캐디로 일하던 시네콕 힐스에서 역사적인 티샷을 한 것이다. 흑인과 함께 경기할 수 없다는 몇몇 프로 선수들의 항의가 있었지만 미국골프협회(USGA) 회장은 시펀의 출전을 밀어붙였다. 공동 6위에 올라 상금 10달러를 받은 시펀은 이후 US 오픈에 다섯 차례 더 참가했다.



1956년에 앤 그레고리가 흑인 최초로 US 여자아마추어 출전 기록을 남긴 데 이어 이듬해 찰리 시포드는 PGA 공동 주관 대회인 롱비치 오픈에서 백인들을 누르고 우승했다. 1961년에는 흑인 최초로 PGA 투어 카드를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PGA 오브 아메리카가 백인만 받는다는 조항을 없애고 프로골프 대회에 ‘모든’ 선수의 참가를 허용한 것도 1961년이다.

1967년 그레이터 하트포드 오픈 인비테이셔널과 1969년 로스앤젤레스 오픈을 제패하고 시니어 자격으로 1975년 PGA 시니어 챔피언십과 1980년 선트리 클래식 우승을 보탠 시포드는 2004년 세계골프 명예의 전당에 입회했다. 이 또한 흑인의 골프 도전사에 있어 최초 기록이었다. 우즈가 2009년 얻은 첫 아들의 이름이 바로 찰리다. 개척자 시포드에 대한 존경의 뜻을 담아 이름을 빌려온 것이다. 시포드는 2015년 92세를 일기로 영면했지만 그의 이름은 여전히 활발하게 회자한다. PGA 투어 노던 트러스트 오픈(LA 오픈)은 2009년부터 골프의 다양성 향상에 기여한 선수에게 ‘찰리 시포드 기념 출전권’을 제공해 대회에 출전시킨다. 이 대회는 제네시스 인비테이셔널로 이름을 바꿔 열리고 있으며 타이거 우즈 재단이 호스트를 맡고 있다.

마스터스에 흑인이 처음 출전한 것은 1975년(리 엘더)이다. 엘더는 당시 컷 탈락했지만 이후 PGA 투어 4승과 챔피언스 투어 8승 기록을 남겼다. 그는 1979년에 흑인 최초의 라이더컵(미국-유럽 남자프로골프 대항전) 출전 기록도 썼다.

우즈 이전에 PGA 투어 흑인 최다승 기록은 캘빈 피트가 가지고 있었다. 피트는 1979년 첫 승을 시작으로 통산 12승을 올렸다. 어릴 적 부러진 팔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완전히 펴지지 않는 팔을 가지고도 PGA 투어 드라이버 정확도 부문에서 10년 연속 1위를 지켰다.

1994년 US 아마추어에서 우승하면서 전설의 길을 열어젖힌 우즈도 종종 인종적 조롱과 악의적 농담의 대상이 되곤 했다. 하지만 그를 깎아내리려는 시도는 압도적인 기량과 기록 앞에 하찮게 보일 뿐이었다. 1996년 PGA 투어 신인상을 탄 우즈는 이듬해 마스터스에서 무려 12타 차 기록을 세우며 흑인 첫 우승의 역사를 썼고 그해 세계랭킹 1위까지 질주했다. 2000년에 US 오픈과 브리티시 오픈(디 오픈)마저 제패하며 최연소 커리어 그랜드슬램(4대 메이저 석권)을 작성하더니 2001년 마스터스 그린재킷을 다시 걸치면서 그 유명한 ‘타이거 슬램(2000~2001년 메이저 4개 연속 우승)’이 탄생했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출처=골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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