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6월 10일 오전 10시, 상륙용 보트 20정에 분승한 미군 650여 명이 강화도 초지진에 내렸다. 병사들이 갯벌을 헤치는 사이에 미 해군의 함포가 불을 뿜었다. 구경 11인치와 9인치 포를 탑재한 콜로라도를 비롯한 5척 함정의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의 성벽은 바로 무너졌다. 포화를 견디다 못한 조선군은 물러났다. 오후 1시 30분 미군 상륙부대는 초지진을 점령하고 ‘22시간 작전’에 들어갔다. 구한말 병인양요와 더불어 구미 세력의 직접적인 침략인 신미양요가 시작된 것이다.
미군의 상륙 목적은 두 가지. 제너럴 셔먼호의 행방을 찾고 조선에 통상을 요구할 참이었다. 출항하기 전까지 미군은 조선군을 무적에 가까운 군대로 여겼다. 5년 전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군이 사상자 27명을 내고 철수했던 마당. 증기선 5척에 병력 1,230 명을 동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아니나 다를까. 6월 1일 강화포대의 포격을 받은 미군은 놀랐다. 미 해군 중령 블레이크는 “남북전쟁에서도 이런 집중 포격은 당해보지 않았다”고 말했을 정도다. 하지만 미군은 별다른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조선군 대포의 성능이 조악했기 때문이다.
포격전은 미군에게 ‘조선군 무적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줬을 뿐이다. 초지진 점령 직후 미군의 적대감은 더 불타올랐다. 조선인 천주교도들이 찾아와 거짓 정보를 흘렸기 때문이다. ‘통상 약속을 믿고 상륙했던 셔먼호의 선원들이 환대를 받고 술에 취해 쓰러져 전원 살해당했다’는 고변에 미군은 보복을 다짐했다. 이튿날 광성보에서 치러진 대대적인 전투에서 조선군은 처절한 패배를 맛봤다. 전사 252명에 투신자살 100명, 포로 20명. 미군 피해는 전사 12명, 부상 20명에 그쳤다.
조선군은 졌어도 미군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슐레이 중령은 이런 글을 남겼다. “조선군은 낡은 총의 총알이 떨어지면 돌을 던졌고 돌이 떨어지면 결사적으로 흙을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가족과 국가를 위해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군인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미군은 결국 물러났다. 한강 수심이 낮아 한양으로의 진격이 어렵고 조선군이 처절하게 저항하는 한 석탄과 식량 부족에 봉착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이겼지만 잊고 싶은 전쟁’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조선은 기고만장했다. 미군을 쫓아냈다는 거짓 보고가 올라가고 대원군은 쇄국으로 치달았다. 신미양요 149주년.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외세에 거짓을 고하던 종교인과 죽음을 불사하던 장병들이 머리 속을 오간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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