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0년 6월 12일 프랑스 파리 루브르 성(城). 국왕 루이 9세가 참석한 가운데 세기의 재판이 열렸다. ‘파리 논쟁(Disputation of Paris)’으로도 알려진 재판은 열리기 전부터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피고가 ‘탈무드’였다. 소송을 제기한 원고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원고 측은 유대인들의 율법서이자 주석 모음집인 탈무드를 모두 압수해 불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와 유대교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교리를 가지고 토론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탈무드 재판(Trial of the Talmud)’ 혹은 ‘파리 신학논쟁’으로 불리는 이 재판은 처음부터 판결이 난 상태에서 진행됐다. 원고 측의 배후가 유대교의 멸절을 원하던 교황 그레고리오 9세였기 때문이다. 교회는 재판의 형식을 빌린 논쟁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믿었다. 원고 측 대표이자 검사 역할을 맡은 니콜라스 도닌 수사는 탈무드를 낱낱이 분석해 35개 죄목을 찾아냈다. 유대인이었지만 개종 후에 교황을 부추겨 재판을 성사시킨 도닌의 상대는 랍비 4명. 대표격인 여히엘 랍비는 15년 전 도닌을 파문한 주인공이었다.
도닌은 먼저 탈무드에 ‘예수가 지옥의 펄펄 끓는 배설물에 흠뻑 젖어 있는 죄인으로 묘사되고 있다’고 포문을 열었다. 여히엘 랍비는 ‘탈무드에 나오는 예수는 3명으로 지옥의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는 다르다’며 ‘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모두 프랑스 왕은 아니다’라고 맞받아쳤다. 랍비들은 묻는 말에만 대답하도록 강요당하는 불리한 입장에서도 토론에서 밀리지 않았으나 재판은 원고 승소로 끝났다. 재판을 맡은 루이 9세는 ‘유대인과 논쟁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그들을 칼로 찌르는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재판은 유대교에 대한 인식을 바꿨다. 구약에 대한 믿음만큼은 공유한다고 여겼지만 재판 과정에서 구약보다 탈무드를 중시한다는 점이 알려지며 유대인에 대한 차별은 더욱 심해졌다. 중세 이후 유대인이 서유럽에서 거의 사라지고 독일과 중부 유럽으로 이주했던 이유가 연이은 박해 탓이다. 재판의 직접적인 결말은 마차 24대 분량(약 1만 권)의 필사본 탈무드 소각. 유럽 각국에서 비슷한 사례가 잇따랐다. 종교개혁의 기수인 마르틴 루터마저 유대인 탄압을 거들었다. 기독교가 그토록 짓누르려던 유대교와 유대인의 오늘날은 익히 아는 대로다. 인간과 그 정신은 물리적 압박으로 분해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국가의 호전성에 동의할 수 없어도 유대 민족의 고난 극복 유전자만큼은 평가받아 마땅하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