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 명의로 유령회사를 만든 다음 이 업체 명의로 이른바 ‘대포통장’ 수백 개를 개설, 사설 도박사이트나 보이스피싱 운영자들에게 판 조직의 우두머리가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그가 약 2년여 기간 동안 수억 원을 챙길 수 있었던 건 모두 ‘가짜’의 밑거름에서 가능했다.
14일 법원에 따르면 서울동부지방법원 형사4단독 박준민 부장판사는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공전자등록등불실기재, 사기 등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지난 8일 징역 5년6개월을 선고했다. A씨는 지난 2016년 12월부터 작년 8월까지 대포통장을 개설해서 하나에 약 100만원씩 받고 판매해 약 3억원을 챙긴 혐의로 기소됐다. 약 2년여간 판매한 대포통장의 수는 330개에 달한다. 이를 위해 노숙자 명의로 유령회사를 만든 혐의도 받는다. 그는 지난 2016년 공동공갈 혐의로 기소돼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은 바 있어 실제 복역해야 할 형량은 더 늘게 됐다.
A씨는 대포통장이 돈이 되겠다는 생각에 계좌 한 개당 통장·체크카드·공인인증서·OTP(일회용 비밀번호 생성기)를 세트로 만들어서 팔기로 했다. 이에 유통조직의 총책으로서 모집책·관리책·판매책 등을 두고 업무 전반을 총괄했다. 계좌의 주 고객은 보이스피싱 운영자, 인터넷 사기 운영자, 사설 도박사이트 운영자 등이었다.
대포통장 수백 개를 만들어낸 원천은 유령회사였다. 이를 위해 전국 각지의 노숙자를 섭외해 돈을 주고 명의를 빌렸다. A씨는 노숙자들의 인감증명서, 주민등록등본, 신분증 사본 등을 고속버스 택배를 통해 받았다. 이 서류는 미리 법인 설립 대행을 의뢰한 어느 법률사무소로 보내졌다. 사무소에서 법인설립등기를 담당하는 직원도 미리 한패로 만들었다. 이 직원은 자본금 3,000만원짜리 주식회사 설립등기를 신청하는데 필요한 서류들을 A씨가 만들어준 대로 접수했다. 자본금은 서류상으로만 있는 것처럼 꾸며낸 존재일 뿐, 회사에 실제로 들어온 적이 없었다. 이른바 가장납입이었다. A씨는 이런 방식으로 2017년 9월부터 약 10개월간 총 36회에 걸쳐 유령회사를 만들었다.
대포통장을 만들기 전엔 인터넷 ‘중고나라’ 카페에서 사기도 쳤다. A씨는 지난 2016년 3월 시계를 구매하려 한다는 카페 글을 보고 550만원을 계좌이체하면 2008년식 롤렉스 시계 풀세트를 고속버스 택배로 보내겠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550만원을 받은 후 시계를 보내지 않았다.
박 부장판사는 A씨에 대해 “조직적 범행을 지휘하고 상당 기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행한 점이 인정된다”며 “유령회사를 만들기 위한 문서도 다량을 반복적으로 위·변조했다”고 판시했다. 개설한 대포통장 수도 매우 많다고 덧붙였다.
/박준호·한민구기자 violato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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