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람이 중요해요. 영화 작업하는 데 있어서도 그렇고요. 어릴 때 전학가는 게 그렇게 싫었어요. 영화 현장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게 꼭 전학가는 기분이에요. 그게 공포로 다가올 때가 있어요.”
데뷔 17년차 배우도 일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이다. 배우 조진웅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합과 의리를 중요시하며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물론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체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건 아니다. 낯섦에 대한 긴장감, 공포의 에너지를 작업의 밀도를 높이는 데 쓰고 싶다는 게 조진웅의 뜻이다.
영화 ‘사라진 시간’ 또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존경하는 선배 정진영의 첫 장편 데뷔작에 부름을 받았고,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모호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시나리오에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조진웅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 ‘사라진 시간’에 대해 “시나리오도 보고, 출연도 했는데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며 “이해를 하려고 하면 안 되는 작업이었다”고 설명했다.
“시나리오 자체가 모호한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어요. 연기를 할 때도 현장에 형구를 집어 던진다는 생각으로 했어요. 개념과 이성을 가지고 그 전에 해오던 연기적 패턴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죠.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는 형이상학적인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그래도 억지스럽지 않았고, 살아있는 대로 시나리오가 펼쳐진 것 같아서 다행이고 고마웠어요.”
‘사라진 시간’에서 조진웅은 형사 형구로 분했다. 형구는 의문의 화재사고를 조사하던 중 하루아침에 자신의 삶이 바뀐다. 집도 가족도 사라지고 갑자기 동네사람들이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자 나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찾아나선다.
조진웅의 말마따나 영화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사라진 형구의 과거는 어떻게 됐는지, 진짜 형구는 선생인지 형사인지 혼란스럽다. 영화는 결말을 내놓지도 않아 해석은 관객의 뜻에 맡긴다. 조진웅은 “(영화에 나오는)송로주를 드시고 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장면의 의미를 당위성을 갖고 해석하려고 하면 이 영화 자체가 이해가 안돼요. 형사에서 국어선생으로 갑자기 바뀌는 게 어불성설이잖아요. 진짜다, 가짜다를 논하기 보다는 형구의 감정을 쫓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 형구가 자기 자신을 선생이라고 인정하고 체념하는 게 가장 큰 리얼리티죠. 자신의 바뀐 삶을 받아들여 체념할 때 저도 눈물이 난다고 해야 되나. 이상한 느낌이었어요.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아주 현실적으로 온도를 받아들여서 체념을 하는 지점에서 연민을 느끼기도 했죠. 이런 해석의 영화를 좋아해요. 기능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화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촬영을 끝낸 지는 오래됐지만, 조진웅은 영화를 마친 소회에 대해 “충북 보은을 산책한 것 같았다”고 했다. 다른 상업영화와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고.
“영화를 찍는 것 같지가 않았어요. 시스템은 영화인데, 다분히 연극적이었고. 카메라를 전혀 의식을 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제가 형구를 던져 놓은 거지 촬영을 하고 있다는 의식은 전혀 하지 않았죠. 카메라 워킹 등 계산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 계산 조차 안되더라고요. 오로지 형구라는 캐릭터에 던져지는 수밖에 없었어요. 촬영할 때 묘한 느낌을 항상 가져가고 싶었어요.”
영화는 배우 정진영의 첫 연출작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정진영 감독은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형구 역에 조진웅을 염두에 두고 제작했다. 이에 조진웅은 “보통 배우들한테 다 그러지 않냐. 나를 꾀려고 그런 것 같다”며 웃었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읽고 난 후의 첫 마디는 “감독님 본인이 직접 쓴 게 맞냐”였다.
“정진영 감독이란 사람이 오랜 시간 영화 작업을 해왔고, 사회적으로도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고. 33년차 배우로서 이런 모든 것들이 응집된 시나리오가 아닌가 싶었어요. 어떻게 해석을 해서 집필을 했는지 궁금증이 생겼죠. 또 신인감독으로서 가져야 할 겸손함이랄까. 그런 것들이 영화에 고스란히 녹아있어요.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도 없었고요. 선배님 성격이 그래요. 강압적이지 않게, 자연스럽게 느껴보라는 식이에요. 그래서 정진영 감독을 ‘햇살 같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조진웅도 정진영처럼 영화감독을 준비 중이다. 정진영 감독을 보며 용기를 낸 조진웅은 슈퍼히어로가 주인공인 단편영화를 제작해 현재 마무리 작업 중이다. 충무로의 굵직한 제작진이 의기투합했고, 차승원이 영화에 특별출연한다.
“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어요. 12년 전부터 영화계 관계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당시에는 인지도가 없어 묵살당했죠. 이제 목소리를 낼 정도가 되니 주변에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웃음) 레퍼런스를 만들어보자는 데 뜻을 모으고 작업을 했고, 영화판에서 활동 중인 굵직한 제작진들이 품앗이 개념으로 함께 해줬어요. 막상 제가 현장에서 메가폰을 쥐어보니 디렉션은 잘 안 하게 되더라고요. 제가 만들고 싶은 영화는 잘 짜인 상업 영화예요.”
/이혜리기자 hyer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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