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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 전쟁, 독재가 남긴 상처…아시아는 여전히 아프다

[책꽂이-슬픈 경계선]아포 지음, 추수밭 펴냄

대만 인류학자의 '아시아의 경계' 여행 기록

케이크 자르듯 그은 국경선…같은 민족 단절

전쟁 중 큰 나라에 휘둘리다가 정체성 상실

한국, 오키나와, 베트남, 캄보디아 등 관찰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지난 16일 오후 경기 파주 통일대교 남단 철조망 뒤로 해가 지고 있다./연합뉴스




북한이 지난 16일 개성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보란 듯이 계획 폭파했다. 4층짜리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건물은 상징일 뿐이다. 진짜 부서진 건 조심스레 품었던 종전의 꿈이다. 파편들을 다시 붙이면 된다고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이어 붙이기엔 과하게 산산조각이 났다. 꿈이 사라진 자리엔 음각으로 깊숙이 그어져 있는 남북 분단의 경계선이 더 뚜렷하게 보일 뿐이다.

엄혹한 현실의 뿌리는 깊다. 일제의 식민 지배, 강제 분단 그리고 참혹한 전쟁의 결과다. 왜 한반도만 이런 고통을 이토록 오래 겪어야 하냐고 누군가는 울분을 토하지만, 대만의 젊은 여성 인류학자 아포(阿潑)는 한반도 외에도 비슷한 이유로 ‘현재 진행형’ 비극을 겪고 있는 나라와 민족이 아시아에 여럿 있다고 저서 ‘슬픈 경계선’을 통해 말한다.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은 19세기 말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쟁탈전에 휩쓸렸다. 수천 년 살아온 땅이 난도질당했고, 민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이데올로기가 덧칠됐고, 독재 정권은 종종 권력 유지를 위해 내부 분열과 반목을 조장했다. 이 과정에서 이웃 민족과는 물론 같은 민족끼리도 증오하며 목숨을 걸고 싸웠다. 지금이야 국제 사회의 따가운 눈초리 때문에 선혈이 낭자하는 싸움을 쉽게 못한다지만 일촉즉발의 불안은 늘 도사리고 있다. 상호 멸시와 혐오, 따돌림도 여전하다.

지난 13일 타이페이의 도로변에 타이완 독립 활동가들이 제작한 배너가 진열돼 있다. ‘타이완 독립’, ‘타이완의 미래는 타이완인들이 결정한다‘ 등의 글이 적혀 있다./EPA연합뉴스


저자는 이런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정체성을 잃고 제대로 된 소속감을 갖지 못한 채 경계선 주변을 맴도는 개인들의 사연에 주목했다. 대만인이라는 저자의 정체성이 이런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갖게 했다. 대만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고, 중국 공산당과 목숨 건 이념 전쟁을 치렀다. 게다가 중국의 힘이 막강해지면서 국제사회에서 주변부로 내쳐졌다. 중국인이지만 중국 본토에 쉽게 갈 수 없고, 막연한 동질감을 느꼈던 아시아 각지 화교들과도 결국 정체성이 같지 않음을 느낀다.

저자는 아시아 각지를 여행하며 지리적, 민족적 갈등을 연구했다. 특히 현지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모호하게 그어진 국경에 도사리는 공포,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소속감의 부재, 전쟁 중 강제로 끌려온 곳에서 받은 멸시 등 경계에 선 사람들이 덤덤하게 털어놓는 아픈 기억을 인류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의 관점으로 정리했다.



2013년 4월 28일 일본 정부가 ‘주권 회복의 날’을 강행하자 오키나와 사람들이 행사 강행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고 있다. 이들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일인 1952년 4월 28일 일본 정부로부터 버림 받았다고 반발했다./EPA연합뉴스


저자가 가장 아프게 생각한 땅은 오키나와다. 역사적으로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방황했던 이 섬은 현재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심적 갈등을 겪고 있다. 일본에 강제 병합된 후 일본인의 차별을 받으면서도 침략 전쟁의 최전선에 내몰렸고,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후에는 다시 미 군정 하에 놓였다. 현재도 오키나와에서는 ‘오키나와는 일본이 아니다’ 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의 제자리 찾기는 여전히 고통스럽다.

메콩강 인근의 중국, 미얀마,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등은 경제 성장을 위해 협력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민족들의 반목이 끊이지 않는다. 모호한 국경 주변에는 ‘땅을 빼앗겼다’‘차별 당한다’ 등의 분노가 낮은 구름처럼 떠다닌다. 또 식민주의자들이 케이크 나누듯이 정한 국경선 탓에 같은 민족 간 교류가 단절되면서 절망감도 커졌다. 베트남, 캄보디아는 전쟁의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개인에게 남겨진 전쟁의 상처는 현재의 삶에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

한국에 대해서는 휴전선과 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해 주목했다. 책은 한국인의 아픔을 ‘당신들이 그어 내게 남겨진 고요한 분열의 기억’이라고 표현한다. 강제로 그어진 경계선이 한반도 사람들을 모질게 갈라놓고 대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방황하다 중국 국적을 갖게 된 조선족과 만난 경험도 전한다. 살기 위해, 또는 항일을 위해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었지만 중국과 북한의 틈바구니에서 정체성을 의심받는 존재가 된 이들이다. 나이 든 조선족은 뿌리의 마지막 흔적인 족보를 끌어안고 살지만 젊은 세대는 “나는 중국인”이라고 말한다.



맥락 없이 타자에 의해 수학공식처럼 그어진 경계
경계를 서성이며 아파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노력은 무엇일까. 저자는 긴 여행 기록의 끝에 ‘역지사지’라는 단어를 적는다. 그리고 ‘서구 역사와 문화에는 익숙해 하면서도 스스로의 역사와 주변 이웃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한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을 타인으로 인정하려는 노력만이 역사의 경계선이 심리적 경계선으로 확장되는 걸 멈춰 세울 것이라고 말이다. 1만7,000원.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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