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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완전하고 최종적인' 협정의 굴레





1965년 6월22일 오후5시, 일본 도쿄 총리관저. 가랑비에 젖은 양국 국기 아래 한일 양국 외무장관이 조인식에 나타났다. 자위대 군악대가 헨델의 개선행진곡을 연주하는 가운데 이동원 한국 외무장관과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은 기본조약(7개조)과 어업, 청구건, 재일교포 법적 지위, 문화재 반환 등 4개 부속문건의 한일협정에 서명했다. 패망한 일본이 조선에서 물러난 지 20년 만에 양국이 서로를 인정하는 공식 관계를 맺은 것이다.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1차 회담 기준으로는 14년8개월 만이다.

한일 양국이 관계 정상화를 위해 처음 대면한 것은 1951년 10월. 양측의 입장은 크게 차이를 보였다. 협상장에 양쪽을 끌어들인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친미진영의 단결을 원했으나 근처에도 못 갔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 사과와 배상 원칙을 말하고 일본은 한국에 많은 재산을 남겨뒀다며 대일청구권과 맞바꾸려는 전략으로 나왔다. 1952년 들어 한국 정부는 이승만 라인을 선포하며 일본 어선을 대거 나포해 양국 사이는 더 나빠졌다. 1953년 3차 회담은 일본 측 수석대표인 구보타 간이치로의 망언으로 바로 깨졌다.



‘일본은 36년간 민둥산을 녹색으로 바꾸고 철도를 깔고 논을 늘려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줬다. 일본이 진출하지 않았다면 러시아나 중국에 점령돼 더욱 비참한 상태가 됐을 것’이라는 망언에 한국민의 분노가 들끓었다. 일본은 구보타의 발언을 취소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4차 회담을 재개했으나 4·19의거로 중단됐다. 이후 장면 내각이 들어선 1960년 10월에야 5차 회담이 열렸고 청구권 위원회도 32차례 개최됐다. 한일 국교정상화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부정권과 1961년 10월부터 장기간 협상한 끝의 산물이었으나 한국인 대부분은 반기지 않았다.

대학가에서는 연일 반정부 및 반일시위가 벌어지고 조약에 서명한 이동원 외무장관은 특별경호를 받았다. 당시 국내 최고부수를 달리던 신문은 ‘왜색문화의 침투를 경계한다’는 사설을 올렸다. 한일협정의 가장 큰 문제는 이승만 정부 이래 한국이 고수한 ‘선 사과, 배상 후 협상’의 원칙이 깨졌다는 점. 사과와 배상이라는 문구도 들어가지 않았다. 문구상으로 한국은 조건 없이 청구권을 없앤 격이다. 한일협정 55주년, 경제개발의 대가로 지불한 대일 누적무역적자가 6,000억달러를 넘는데도 일본은 한국을 대놓고 제재한다. 구보타의 망언은 국내 학자의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둔갑하고 왜색문화가 판친다. 한국은 과연 얼마나 나아졌을까.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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