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 폐막식. 화려한 삼바 공연 등으로 분위기가 한껏 고조돼 있던 가운데 무대 중앙에서 일본 닌텐도 사의 게임 캐릭터 슈퍼 마리오가 등장했다. 올림픽의 마지막을 TV로 시청하던 전 세계 사람들이 갸우뚱 하는 순간 곧바로 슈퍼 마리오의 정체가 드러났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일본을 상징하는 붉은 공을 들고 공연장 한 가운데서 불쑥 솟아오른 것이다.
후일 이 같은 깜짝 쇼를 위해 일본 정부가 120억 원이 넘는 돈을 쓴 것으로 알려졌지만 현장 관객과 시청자의 환호 속에 아베 총리는 ‘아베 마리오’란 별명을 얻었다. 이벤트 직후 지지율은 62%까지 치솟았다.
그로부터 4년 후, 아베 총리가 그토록 공을 들인 ‘2020 도쿄 하계올림픽’은 코로나 19로 1년 연기됐다. 내년에 제대로 치를 수 있을 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아베 총리의 지지율은 올림픽 연기에 감염병 늑장 대응, 측근 스캔들까지 겹치면서 지난달 말 29%까지 떨어졌다. 다시 ‘강한 일본’을 만들겠다는 아베 총리의 꿈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쉽게 재도약하지 못하는 까닭은 코로나 19와 올림픽 연기 때문이 아니다. 30년 가까이 일본을 연구해온 미국의 국제전략분석가 브래드 글로서먼은 저서 ‘‘피크 재팬: 마지막 정점을 찍은 일본’을 통해 19세기 중반 강제 개항 이후 롤러코스터를 연상케 하는 부침을 반복하며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의 독특한 사정들이 오늘날 일본을 붙잡고 있다고 분석한다.
특히 저자는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90년 대 말 거품 붕괴 이후 총체적인 국가 변화의 동인이 될 수 있는 대형 충격을 4차례나 겪었음에도 겉으로 언뜻 보기엔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듯한 일본 사회를 들여다본다.
저자는 마이니치신문 기자, 재팬타임스 논설위원, 다마(多摩)대학교 형성전략연구소(CRS) 부소장 등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만난 정치인, 관료, 학자들과의 인터뷰, 통계 자료 분석 등을 통해 21세기 이후 일본을 강타한 4대 충격으로 리먼 사태, 정권 교체, 센카쿠 충돌, 동일본 대지진을 꼽는다.
먼저 전 세계를 강타한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는 2위 경제대국 일본 산업 전반을 뒤흔들었다. 외국인 자금이 대거 이탈하면서 닛케이지수는 폭락했고, 은행들은 휘청댔다. 금융위기가 실물로 전이돼 도산 기업이 속출했으며, 세계 불황의 여파로 수출은 치명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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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일본 유권자들이 54년 만에 정권을 교체한 이후 벌어진 일도 충격이었다. 자민당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민주당에 권력을 쥐어 주었지만 통치 경험이 없는 민주당은 아마추어 정권 그 자체였다. 관료를 다루지도 못했고, 내치와 외교 전반에서 자민당과 뚜렷한 차별화도 이뤄내지 못했다.
민주당이 우왕좌왕 하는 사이 센카쿠 열도에서 중국과 분쟁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일본이 아시아라는 기러기 떼의 우두머리라는 ‘안행(雁行)이론’에 빠져 있던 일본인들에게 급부상한 중국의 힘이 얼마나 큰 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중국의 희토류 대일 수출 금지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일본인들은 충격을 받았고, 일본 내에서는 평화 헌법을 고쳐 재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마지막은 동일본대지진이다. 대지진과 쓰나미, 원전 폭발로 인한 인명·경제 피해도 막대했지만 무엇보다도 ‘일본 시스템’ 자체에 대해 불신을 촉발했다. “자연재해가 일본을 발가벗겼다”는 한탄 속에 ‘일본은 특별하다’는 자부심은 산산조각 났다.
이런 쇼크를 겪은 뒤 2012년 말 재등장한 인물이 아베 총리다. 그는 ‘팽창’과 ‘재탄생’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일본 재건을 이루겠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저자는 아베의 꿈이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한다. 섬나라 일본을 옥죄어 온 구조적·태도적 한계가 4대 충격을 겪고 나서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속히 진행되는 고령화와 신흥국들의 경제 성장으로 과거의 ‘영광스러운’ 경제적 지위를 되찾기도 힘들다. 무엇보다 아베 총리가 제시한 일본의 미래상에 대한 일본인들의 생각이 다르다. 아베 총리는 경제·안보·외교를 주도하는 국가를 지향하지만, 일본인들은 대체로 안정 지향적이다. 불황 이후에 태어난 일본 젊은이들은 ‘잘나가던’ 시절을 경험조차 해본 적이 없다. 이런 상황을 두고 저자는 “일본은 마지막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한다.
다만 저자는 이런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성장에 대한 집착이 아닌 ‘작더라도 세련되고 성숙한 일본’을 지향하는 내부 목소리에 주목한다. 일본은 여전히 엄청난 노하우과 인적 자원을 보유하고, 고령화 등 21세기 문제를 가장 먼저 풀어나가고 있는 국가다. 주도국이 아닌 파트너의 개념으로 아시아 외교관계를 재정립한다면 일본의 발전 경험은 국제 사회에서 좋은 공유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일본은 한국에 롤모델이자 반면교사 |
또 현직 외교관으로서 책을 번역한 김성훈 외교부 중동2과장은 “맹목적 숭배의 대상도, 감정적 증오의 대상도 아닌 일본 그 자체를 바라보고 일본의 방향성을 예의주시함으로써 우리의 미래에 주는 함의를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1만9,800원.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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