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 입은 소리꾼이 병풍 앞에서 부르는 한(恨) 깊은 전통 음악을 생각했다면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카페 같은 무대, 점프슈트와 운동화 차림의 소리꾼이 무대와 객석을 종횡무진 누비며 남미 소설을 맛깔진 우리 소리로 풀어낸다. 한복(형식)을 벗어 던진, 그래서 더 깊고 진한 소리꾼 이자람의 판소리 1인극 ‘이방인의 노래’다.
이방인의 노래는 이자람이 남미의 대표 소설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단편소설 ‘대통령 각하, 즐거운 여행을!’을 원작으로 2016년 초연했다. 제네바에 사는 외국인 노동자 부부 라사라와 오메로가 큰 병을 고치기 위해 이곳에 온 고국의 전직 대통령을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국내는 물론이고 대만·일본·헝가리·프랑스 무대에도 올라 호평을 받았다. 이번 공연은 초연 후 4년 만의 무대다.
작품의 매력은 ‘기분 좋은 생경함’에 있다. 배경도, 인물도, 그들의 이름조차도 모든 것이 이국적인 남미 소설 원작에 소리꾼의 외양(?)까지. 구수한 우리 소리가 귀에 제대로 들어올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이자람이 그려가는 무대를 보고 있노라면 우려는 이내 감탄으로 바뀐다. 오메로가 전직 대통령을 만나 평소 먹기 힘든 스테이크를 영접하고, 이게 탈이 나 귀갓길에 곤욕을 치르는 장면에선 판소리 특유의 익살이 빛을 발한다. ‘아직 집까지는 한참이 남았는데 난리 난 대장을 어쩌란 말이냐/울상이 된 오메로 새하얘진 오메로 식은땀 흘리는 오메로 (중략) 직업에만 귀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음식도 귀천 가려 사람 골라 흡수되더냐.’ 원작에서는 고기 먹는 장면이 그리 길지 않지만, 판소리극으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에피소드의 분량을 조절했다.
이자람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단연 압권이다. 그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해설자부터 오메로, 라사라, 전직 대통령을 넘나들며 관객의 85분을 요리한다. 테이블에 앉은 관객의 맞은편에서 천연덕스럽게 대사를 던지는가 하면 “소리꾼 이자람이 제네바만 못 가본 줄 알았더니 카리브도 모르는구나” 하며 이야기에 직접 개입하기도 한다. 그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이야기에 빠져 있노라면 ‘책으로 읽어도 이토록 재밌을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고수의 구성진 추임새와 북소리, 그리고 기타의 이국적인 선율이 만나 빚어내는 색다른 음악도 귀를 자극한다. 재연에서 새롭게 선보인 무대도 작품의 배경과 정서를 한층 선명하게 담아낸다.
“이 원작이 판소리와 어울리느냐는 제 선택 순위에서 100위 정도일걸요.” 이자람은 최근 열린 프레스콜에서 작품 선정 기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판소리로 만들기에 적합하냐보다는 “이걸 하고 싶다”는 끌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이방인의 노래도 마찬가지였다. 소설을 읽고 낮잠을 잔 뒤 일어나 ‘나 이거 해야겠다’고 떠올린 게 이 작품의 시작이었다. 틀을 과감하게 벗어던진 무대, 젊은 아티스트가 뿜어내는 에너지에 매료되지 않을 관객이 어디 있을까. 7월 5일까지 더줌아트센터.
/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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