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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아침에] 껍질에 갇힌 나라

김영기 논설위원

코로나 이후 세계경제 구조 대격변

나라마다 생존·미래전략 찾기 혈안

지금은 곳간속 재산나눠줄 방식보다

곳간 더 채우고 늘릴 방법 고민할때





‘정치인 김종인’은 타고난 포퓰리스트다. 그의 의제설정 능력은 다른 정치인이 필적하기 힘들 만큼 노회하다. 진보의 전유물이던 경제민주화를 대선후보 박근혜에게 안겨준 수완은 상대방의 운동장을 빼앗는 동물적 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총선 패배의 수렁에 빠진 야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기본소득을 어젠다로 꺼낸 것은 재난지원금이라는 사탕을 즐긴 국민 마음을 정교하게 파고든 정치적 행위다. 기본소득이 당장 실현 불가능함을 뻔히 알면서도 좌클릭으로 당의 외연을 넓히고 보겠다는 계산의 산물이다. 그가 대선까지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한다면 진보진영의 의제설정 기회 자체를 제거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선거가 아닌 국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의 행위는 비겁하다. 지금의 대한민국에 절실한 담론은 따로 있음을 김종인 스스로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마이클 스펜스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 교수는 과거 인터뷰에서 “세계 경제의 구조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국가는 망할 수밖에 없다”고 설파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혼돈에 빠진 세계 경제는 ‘구조적 변화’라는 용어 자체가 한가로울 정도다. 경제 주체 모두 생존을 장담 못 하는 시대다. 국가마다 각자도생을 위해 투박하면서도 치밀한 전략을 펼치고 있다. 지도자들의 눈빛은 미래의 패권과 새로운 성장의 힘을 찾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국 기술을 이용한 반도체를 중국에 줄 수 없게 한 것은 미래 먹거리를 위한 경제 전쟁의 상징이다. 지금은 한국을 동맹이라 하지만 머잖아 화살은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미국(점유율 47%)을 추격 중인 한국(19%)의 목줄을 겨냥할 것이다. 20명 넘는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할 만큼 기초과학 강국인 일본이 연구력이 떨어진다며 700명의 젊은 과학자를 키우겠다고 나선 것을 보면 섬뜩하다.



세계의 변화가 이토록 무섭게 벌어지는 지금 대한민국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물론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려는 시도는 하고 있다. ‘한국판 뉴딜’ ‘데이터 댐’ 등 정책의 단어만 보면 문재인 정부의 비전은 화려하다. 그런데 여기까지다. 텅 빈 수사(修辭)만 있을 뿐 실행은 없다. 코로나19가 창궐한 지 반년이 됐건만 관료들의 정책 상상력은 제자리다. 이념과 규제의 껍질은 도리어 두터워졌다. 나라 곳곳에는 어설픈 평등주의가 넘실댄다. 대통령이 임기 후반 꺼낸 ‘평등 경제’의 어젠다는 진솔함을 찾기 힘들다. 정규직 전환을 둘러싼 인천공항공사의 혼란은 ‘선의의 역설’을 넘어 퇴행적 노동시장의 표본이자 의욕만 앞선 아마추어 정부의 참혹한 정책 실패다. 기본소득을 말하면서 ‘거위 털 뽑기’가 몰고 올 두려움을 생각한 듯 누구도 대놓고 증세를 말하지 않는다. 꼼수로 세금을 더 걷을 궁리로 내놓은 것이 고작 주식 양도세다. 인공지능(AI)을 외치는 나라에서 대학들은 ‘수도권 정원 규제’에 가위눌리고, 리쇼어링을 하겠다면서 수도권 공장 총량제는 성역처럼 공고하다. 정치·경제·사회·문화에 이르기까지 지도층 누구도 나라의 미래를 제대로 말하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2년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 ‘비전 2030’을 내놓았다가 실행력이 없다며 욕만 먹고 폐기 처분했다. 그래도 보고서 곳곳에는 선진국에 대한 열망과 고민이 묻어났다. 우리 국민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제조 2025’만큼은 아니어도 10년 후 대한민국이 어떤 모습으로 나아갈지 알고 싶어 한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국가 지도자와 집권 세력의 의무다. 19세기 프랑스 정치학자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모든 국민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고 말했다. 우리 국민은 국가의 성장과 선진화를 향한 담론을 말하고 강하게 실행해나갈 지도자를 얻을 권리와 자격이 있다. 대한민국 지도자가 이 순간 꺼내야 할 의제는 곳간 속 재산을 나눠주는 방식이 아니라 곳간을 더 채우고 늘려나갈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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