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 공장에서 나오는 탄 냄새와 고된 철도 노동자들의 땀 냄새로 가득하던 동네가 있습니다.
연신 철을 두들기며 사람 냄새 풍기는 대장간 형제의 미소도 볼 수 있죠.
서울 서북부 철도 교통의 요지에서 ‘강북의 코엑스’로 불리며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이 지역. 역지사지 두 번째 주인공은 바로 서울시 은평구 수색동입니다.
■‘물(水)’이 흐르던 조용한 동네 수색동
서울 서북부에 위치한 수색동. 지금은 속속 들어선 주상복합단지로 둘러싸인 곳이지만 불과 10~20년 전만 해도 단층 다세대 주택들과 빌라들로 가득했던 동네였습니다.
90년대 이후 업무지구 조성과 2002한일월드컵 경기장 건설 등으로 발전을 거듭해 온 철로 건너편 상암동과 달리 낙후된 상태로 방치돼 오다 최근 들어서야 개발이 진행되고 있죠.
수색동(水色洞)은 한자 뜻풀이 그대로 물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지역입니다. 한강 하류에 위치한 수색동은 예부터 물과 깊은 인연이 있던 곳입니다. 수색동은 ‘물치’, ‘무르치’라는 우리말이 세월을 지나 변해오다 한자로 표기된 명칭이죠. 명칭이 정해진 이후 수생리계(水生里契), 수색리계(水色里契), 수암리계(水岩里契), 학암리계(鶴岩里契)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조선 시대까지 수색동은 경기도 고양군에 속해 있었습니다. 특히 지금은 구마저 다른 상암동과 한 행정구역으로 묶여 있었죠. 하지만 한일강제병합 직후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에 속해 있던 수색동은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59호에 의해 서울시에 편입돼 서대문구 수색리가 됐다가, 1950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 조례 제10호에 의해 서대문구 수색동이 됐습니다. 이후 1979년 10월 10일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해 은평구가 신설돼 은평구 수색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죠.
예부터 이 지역은 서울에서 서북지방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길목으로 중요한 길목으로 인식됐습니다. 조용했던 수색동에 사람들이 들어오게 된 것은 일제가 만든 조차장이 가장 큰 역할을 했습니다. 조차장은 객차와 화물차를 열차로 편성 또는 분해하는 정차장인데 철도를 통한 물동량을 높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곳이죠. 당시 대륙으로 전선을 넓혀가던 일제는 물자 수송을 위해 서울부터 신의주로 이어지던 경의선에 주목했습니다. 경의선의 출발지와 다름없었던 수색역의 물동량을 높이기 위해서 큰 규모의 조차장을 만들어야 했죠. 따라서 일제는 45만 평이나 되는 방대한 부지에 수색 조차장을 건설하려고 했습니다. 건설 당시 동양 최대급이었다고 전해지는 수색 조차장은 일제가 패망하면서 완성되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그 부지 일부에 철도 차량 등의 보관을 하는 차량 기지만 건설돼 오늘까지 남겨져 있습니다.
■수색동에 유독 목욕탕이 많은 이유?
수색동은 서울에서도 유독 목욕탕이 많은 지역이었어요. 현재도 수색역 삼거리 부근에는 대중목욕탕 2곳이 왕복 2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죠. 지금은 문을 닫은 삼표연탄 공장과 삼천리 연탄 공장, 무연탄 화물열차의 종착역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이 지역에 연탄 공장이 많았던 것은 근처에 수색역이 있어서 강원탄광으로부터 직접 석탄 운반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매일 저녁 퇴근 시간이 되면 시커먼 탄가루를 뒤집어쓴 인부들이 삼삼오오 모여 목욕탕으로 향하는 모습이 일상처럼 느껴졌던 곳이었죠.
현재 삼표연탄 공장이 있던 은평구 수색동 76 일대는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서 있습니다. 수색역에 인접한 곳으로 GS건설이 19층짜리 4개동 총 320가구 규모로 지어졌죠. 2006년 GS건설이 직접 땅을 매입해 시행ㆍ시공을 모두 진행한 사업이었습니다.
수색동에는 근처 차량기지와 변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철도기관사 관사’와 ‘한국전력 관사’들도 주로 수색역 앞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관사는 1910년에 지어진 것으로 한 채에 두 가구가 거주하는 2호 연립 관사로 해방 후 개인에게 불하됐습니다. 80년대 수색동 인구가 급증하면서 관사촌 주택들은 증축 후 세를 놓았고 92년 보일러가 보급되기 전까지 불을 때는 4개의 아궁이와 연탄 2,000장을 보관하던 광이 있었죠.
또한 철도 노동자들과 연탄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주택들이 이곳에 속속 들어서면서 수색동에는 전기 공급을 원활하게 할 시설이 필요했습니다. 이 때문에 1937년, 수색변전소를 세웠죠. 수색변전소는 1970년대 이전까지 남한의 최대 전력시설물로 알려졌죠.
많은 노동자가 거주하게 되면서 70년대까지만 해도 수색동 상권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변전소와 차량기지, 역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수요가 온전히 수색동으로 이어져 상권을 이끌었죠.
하지만 차량기지와 수색변전소가 낙후되거나 혐오시설로 인식되면서 오히려 수색동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됐습니다. 강남 등 다른 지역이 서울 중심지로 부상하는 동안 여전히 7080 감성을 가진 도시로 박제돼 있었죠.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수색동엔 낡고 허름한 단층의 주택들이 방치돼 있었어요. 특히 고지대에 이런 건물들이 많았죠. 이들은 1961년 서울역 앞 중구 양동(현재 남대문로5가)·도동(현재 동자동) 지역 철거민들이었습니다. 수색역 근처 언덕은 철거민들이 이주해 정착한 저소득층 밀집 지역이었죠. 과거 양동과 도동은 대표적인 윤락가 지역이었는데 서울시기본계획에 따라 철거민들은 살고 있던 곳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죠. 양동과 도동 주민들은 이 지역이 철거된 후 대지가 저렴해 판잣집을 지을 수 있고 도심서 멀지 않은 곳을 찾다가 수색동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으로 들어와 판잣집을 짓고 살게 됐습니다.
한 사료에 따르면 1961년 920가구 4,800여명의 철거민들이 수색동 동쪽 산기슭에 정착하면서부터 이들이 산을 닦아 아무렇게나 집을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때문에 해마다 몇 차례씩 산사태로 하수구가 막히고 수도가 들어오지 않아 동민들은 20개의 공동우물, 100여개의 개인 우물을 마셨다고 해요. 그만큼 열악한 생활환경을 가진 곳이었죠.
■낙후된 동네의 대명사가 된 수색동
경의선 때문에 수색동은 마포구 상암동과 쭉 단절돼 왔습니다. 하지만 1936년 두 지역을 연결하는 지하통로가 생겨났죠.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와 수색동을 오가는 지름길인 이 지하통로는 두 지역의 절묘한 대조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데요. 상암동 쪽에서 길이 188m의 지하통로를 걸어 나가면 재개발 지역의 원주민들의 애환과 희망이 그대로 투영된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수색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저개발 지역인 탓에 수색 주변의 삶은 여러 문화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시로, 영화로 재탄생하게 했습니다.
썩은 몸 위에 아직도 수색은 가지 않고 남아있다
서울의 모든 것이 흘러가고 있어도
굴다리와 송전탑과 치킨집과 충남쌀집과 5번 종점
늙지 않은 얼굴처럼 가지 않았다
속초 해남 우이 아내에게 10년이 흘렀지만
,....(중략)
-고형렬, ‘수색은 가지 않는다’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의 본적지도 수색동으로 설정함으로써 판잣집에서 자라 불우한 환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스토리에 힘을 불어넣었습니다.
■상암 개발로 주목…시작된 ‘수색증산뉴타운’ 사업
하지만 인접지역인 상암동의 발전과 함께 수색동도 개발이라는 열매를 맛볼 수 있게 됐습니다. 수색동이 개발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풍수학적 요인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는데요.
현재 서울월드컵경기장을 마주 보고 솟아있는 매봉산을 기준으로 매봉산 동쪽의 풍요를 이루던 지역이었지만 매봉산이 등 돌린 서쪽 골짜기는 유사 이래 서울의 모든 쓰레기가 쌓여 산을 이루는 버림받은 땅이었습니다. 이는 쓰레기 매립장이 있던 난지도(蘭芝島) 말하는 것인데요. 당시 난지도는 비가 오면 잠기고 개이면 모습을 드러내는 나지막한 섬이었습니다. 압도(鴨島), 중초도(中草島)는 난지도(蘭芝島)라고 하는데 글자 그대로 난초와 지초로 어우러진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죠. 풍수에서는 이곳을 나성(羅星)이라 하며 강물의 흐름을 느리게 하므로 재물에 이로운 길사(吉砂)로 봤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1978년부터 1993년까지 서울시에서 나오는 쓰레기가 매립되면서 높이 99m와 96m의 거대한 인공 산 2개가 만들어졌습니다. 이에 따라 상암동과 수색동의 풍수환경이 변화하면서 주민들의 삶도 변화를 겪었죠.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나쁜 기운이 점점 정화됐고 강변을 따라 튼튼한 도로가 조성되면서 버림받은 골짜기의 상류에서부터 흘러내린 물이 한강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 지리의 흉함을 크게 보완했다. 자연적인 지형 위에 도로가 만들어짐과 건축을 위한 터의 평탄 작업 등은 물길을 개선하며, 나아가 그 지역의 운명을 개선하는 효과로 나타난 것인데요. 이런 이유로 상암동에 대단지 아파트와 상암 DMC가 건설될 수 있었습니다.
상암동의 개발 효과는 자연히 인접지인 수색동으로 파생됐고 하나의 ‘클러스터’처럼 수색동의 개발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죠.
물론 개발을 이끈 것은 풍수지리적 요인이 사회경제적 요인과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개발 계획에 우선 할 수 없겠죠.
서울시는 수색동은 신촌이나 영등포 같은 부도심으로 육성할 계획입니다. 다양한 활동이 가능한 특성 있는 생활권으로 변화시켜 이웃 상암지구 개발과 함께 21세기를 준비하는 지역개발, 문화생활을 즐기고 남을 생각하는 마을, 가장 잠재력 있는 신흥지역으로 성장시킬 계획이죠.
수색동 안에서 가장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곳은 수색역과 DMC역 건너편에 자리한 수색증산뉴타운입니다.
‘수색증산뉴타운’은 서울 은평구 수색동, 증산동 일대에 추진 중인 뉴타운 사업으로 수색 1~14구역, 증산 1~6구역으로 추진되는 대규모 재개발 사업입니다.
지난 2006년 뉴타운으로 지정되기 전에도 은평구 수색동, 증산동 일대는 꾸준히 재개발 수요가 있던 지역이었는데 재개발 구역 한가운데 자리한 수색변전소 처리 문제로 계속해서 난항을 겪다가 뉴타운 사업으로 연결됐습니다.
수색증산뉴타운은 은평구에서 ‘은평뉴타운에 이은 뉴타운’으로서 상암 DMC의 배후 단지 구축을 목적으로 조성되고 있습니다.
수색증산뉴타운은 자타 공인 서울 최고의 입지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지하철 6호선과 경의중앙선, 공항철도 등 3개 노선이 지나는 ‘트리플 역세권’ 입지에 광화문 종로로 대표되는 강북 도심과 차량으로 20분 안에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입니다.
또한 DMC역 주변 일대의 개발 사업이 동시에 추진되고 있다는 점도 수색증산뉴타운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호재 중 하나입니다. DMC역과 연계해 들어서기로 예정된 복합쇼핑몰(롯데몰)도 수색증산뉴타운의 가치를 높여주는 또 하나의 요인이죠.
본격적인 개발은 2017년 6월 수색역과 인접한 수색 4구역 ‘DMC 롯데캐슬 더 퍼스트’로 시작됐는데요. 이 단지의 경우 지난 6월 말 입주를 시작했죠.
2018년 12월에는 디지털미디어시티역과 인접한 수색 9구역 ‘DMC SK VIEW’가 분양됐습니다.
올해는 무려 4개 구역에서 4,745가구 물량이 쏟아질 전망이죠. 올해 분양되는 구역은 분양 물량이 가장 많으면서도 알짜이기 때문에 내 집 마련을 노리는 이들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수색 개발의 두 가지 아킬레스건
이곳 개발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지금까지 ‘수색변전소 지중화’ 문제였습니다. 지난 2011년 은평구와 한국전력공사가 수색증산뉴타운 사업의 일환으로 업무협약을 체결한 사업인데요. 현재 변전소를 지중화하는 작업을 추진 중이며, 전 시설과 고압선을 지하 30~40m로 묻고 지상 부지는 업무 시설, 공원, 판매 및 문화체육 시설로 건설하려 하고 있습니다. 당초 2020년까지 지중화하는 청사진이 있었지만 인허가 지연 등 여러 요인으로 착공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울시가 수색역세권 개발과 통합해 추진하기로 계획을 변경하면서 2023년까지 완료한다는 목표를 세웠죠. 아울러 부지에 주거 시설을 추가하는 방안도 포함됐습니다.
또 뉴타운 사업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게 됐을 때 인근 학교를 품은 곳이 많지 않은 것도 문제로 꼽히고 있습니다. 수색동 부근의 한 공인중개사 관계자는 “아무리 개발이 된다고 해도 이곳에 학교가 없는 것이 문제”라며 “학군 개발이 병행되지 않는 한 집값이 오르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2010년 서울시교육청은 서울 시내 15개 뉴타운에 초ㆍ중ㆍ고등학교 31곳 신설 계획과 함께 수색증산뉴타운 지역에도 초등학교 1개를 새로 만들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학교 신축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탄가루가 날리는 낙후된 동네에서 고층 아파트와 복합 쇼핑몰과 문화 단지 건설로 연일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동네, 수색동.
철거민들의 눈물과 한숨으로 어두웠던 동네에서 서울의 새로운 혁신을 향한 심장으로 발돋움하려 몸부림치고 있는 동네, 수색동.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수색동의 20~30년 뒤 모습은 어떤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줄까요?
/이종호 정수현기자 차현진 인턴기자 phillie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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