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의 맨해튼 파크애비뉴에는 건축학도들에게 유명한 오피스 빌딩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시그램(Seagram)빌딩’입니다. 1958년에 준공된 시그램빌딩은 군더더기 없는 기본을 중시한 설계로 오피스 빌딩의 전형(典刑)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시그램 빌딩은 독일계 미국인 건축가 미스 반데로어의 작품으로 그는 “더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다(less is more)”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의 건축 세계를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실제 시그램빌딩은 60년이 지금까지도 맨해튼의 새로 지어지는 오피스 빌딩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세련미를 자랑합니다.
한국 오피스 건축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건축가 고(故) 김중업 씨가 설계한 서울 종로구 관철동의 ‘삼일빌딩’은 시그램빌딩의 영향을 크게 받은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힙니다. 1970년에 준공된 삼일빌딩은 시그램빌딩과 마찬가지로 네모반듯한 직사각형 형태 입니다. 김중업 건축가는 삼일빌딩을 설계하면서 전 세계 오피스 빌딩들을 둘러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때 시그램빌딩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1999년에 준공된 종로구 서린동의 ‘SK서린빌딩’도 시그램빌딩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SK서린빌딩을 설계한 건축가 김종성이 바로 미스 반데로어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김종성 건축가는 과거 인터뷰에서 “시그램빌딩과 SK서린빌딩은 건축물의 기본 구조를 건축미와 일치시키는 데서 시작했으며 곡선 없이 직선 형태로 꼿꼿하게 올라가는 순수한 형태를 강조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 “여성의 복장에 비유하자면 화려한 옷은 1~2년만 지나면 유행이 지나 퇴색되기 마련이지만 정장과 같은 옷은 시간이 지나도 그 가치가 달라지지 않는다. SK서린빌딩도 건축의 기본을 간직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SK서린빌딩에 큰 영향을 준 시그램빌딩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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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근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시그램빌딩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얼마 전 “디벨로퍼가 역사적인 시그램빌딩을 새롭게 바꾸고 있다”고 보도했는데요. 시그램빌딩은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약 3,250㎡에 달하는 주차장 공간을 ‘시그램 플레이그라운드(Seagram Playground)’로 바꿀 계획입니다. 이곳에는 농구장·암벽등반 시설·요가실·실내 트랙·복싱링·웨이트트레이닝룸 등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이를 위해 시그램빌딩을 소유한 부동산 재벌 아비 로젠의 RFR홀딩스는 2,500만달러 투자해 올 연말께 공사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아비 로젠은 WSJ와의 인터뷰에서 “(시그램빌딩은) 젊은 직원들에게 제공해야 할 무엇인가가 빠져 있었다”며 “(시그램빌딩을 임차하는 기업들이) 젊은 직원들을 고용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현대적인 편의 시설과 스포츠 시설과, 현대적인 디자인을 갖춘 건물로 탈바꿈시킬 필요가 있다”며 건물에 변화를 주고 있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밀레니얼 세대나 Z세대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공간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또한 아비 로젠은 이 같은 변화를 통해 최근 허드슨야드로 옮겨간 웰스파고의 빈자리를 채우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김종성 건축가도 “시그램빌딩이 지하 주차장 수입 보다는 젊은 직원들이 원하는 스포츠 편의 시설과 휴게 시설을 만들어서 임차인을 유치하려는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또 WSJ는 시그램빌딩의 이 같은 변화에 대해 “역사적인 자산을 새롭게 바꾸려는 시도는 오피스 시장이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고 있는가를 보여준다”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까지 발생하면서 오피스 시장이 더 많은 변화를 겪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편 아비 로젠은 “줌(Zoom)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지만 줌에서 무엇인가를 만들 수는 없다”며 코로나19 이후 얘기가 나오고 있는 오피스 시대의 종말은 과장되었다고 견해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고병기기자 staytomorro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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