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전 숨진 채 발견된 박원순 서울시장은 재야 시민운동가로 활동하다 서울시장에 당선되며 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특유의 소탈한 성품과 결단의 리더십을 앞세워 내리 3선에 성공하며 역대 최장수 서울시장에 이름을 올렸다. 영원한 잠룡으로 불리던 박 시장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서 대권 주자로서의 꿈도 쓸쓸히 사라지게 됐다.
박 시장은 지난 1956년 3월 경남 창녕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1975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지만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시위에 나섰다가 투옥돼 1학년도 마치지 못하고 제적됐다. 박 시장이 시민의식과 연대협력을 인생 최대의 가치로 삼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한 박 시장은 1980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구지검 검사로 발령받았다. 하지만 사형집행 장면을 참관하지 못하겠다며 6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이후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을 맡으면서 인권변호사로 변신했다. 조 변호사와 함께 만든 정법회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전신이다.
박 시장은 조 변호사가 타계한 이듬해인 1991년 유학을 떠나 영국 런던정경대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수학하며 시민운동에 눈을 떴다. 귀국 후 1994년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했고 아름다운재단을 세워 나눔과 기부를 우리 사회에 처음 확산시켰다. 이후 시민운동계의 싱크탱크로 자리잡는 희망제작소를 설립했다.
참여연대·희망제작소 등 시민운동가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던 박 시장의 삶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계기로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맞는다. 당시 안철수 서울대 교수와의 극적인 단일화는 아직도 회자된다. 서울시 행정을 맡은 박 시장은 반값등록금, 무상급식,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청년수당, 도시재생 등을 차근차근 선보이며 재선에 성공했다. 박 시장은 2017년 19대 대선에 출마하려다 낮은 지지율로 뜻을 접은 뒤 이듬해 사상 첫 3선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강남·강북 균형 발전과 미세먼지 저감, 수소경제 인프라 구축, 제로페이 출시 등이 주요 성과다.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선제적으로 대처하면서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어김없이 발휘했다.
박 시장은 올 4월 서울시장 참모를 대거 교체하고 사실상의 대권 행보에 돌입했다. 6일 열린 민선 7기 2주년 기자간담회에서도 “지지율에 신경 쓰지 않고 본분을 제대로 하다 보면 국민들이 진정성을 알아줄 것이라 생각한다”며 욕심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9일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서 ‘영원한 시민운동가’로 남게 됐다.
이날 서울시가 공개한 유서에는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는 심경이 짤막하게 담겼다. 박 시장은 유서에 “내 삶에서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며 “오직 고통밖에 주지 못한 가족에게 내내 미안하다”고 적었다. 이어 “화장해서 부모님 산소에 뿌려달라, 모두 안녕”이라고 끝맺었다.
박 시장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이날 오전부터 여야 정치인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조문이 이어졌다. 박 시장의 측근인 박홍근·이학영·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침통한 표정으로 빈소를 가장 먼저 찾았다. 장례는 사상 첫 서울특별시장(葬)에 5일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오는 13일이다. /이지성기자 engin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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