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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054년 동.서 교회 분열

상호 반목과 파문, 결별

1054년 7월 16일 토요일 오후 3시, 콘스탄티노플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로마 교황(레오 9세)의 사절단, 추기경 2명과 대주교 한 명이 제단에 파문장을 올려놓았다. 대상은 케롤라리우스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와 지지자. 이튿날 크게 분노한 케롤라리우스 대주교는 사절단 3명에 대한 파문령을 내렸다. 동서 교회의 상호 파문은 분열로 이어졌다. ‘하나의 보편교회’였던 기독교가 동방의 그리스 정교(Orthodox Church)와 서방 가톨릭(Catholic Church)으로 분열된 것. 둘은 갑자기 갈라졌을까. 그렇지 않다. 쌓이고 쌓인 감정과 반목으로 등을 돌렸다.

무엇보다 다른 언어를 썼다. 동방은 그리스어, 서방은 라틴어를 사용해 사고방식과 문화가 달랐다. 같은 로마제국을 표방했어도 정치 구조는 제각각. 처음에는 교황이 동방의 황제에게 밀렸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비잔틴이 물려받았다. 둘째, 신앙의 중심이 동방에 있었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옥, 예루살렘 등 로마제국의 5개 대교구 가운데 4개가 동방에 몰렸으니까. 서로마제국의 붕괴(476년)와 함께 균형은 더욱 동방에 기우는 것 같았지만 정치적으로 거센 변화가 일었다.

이슬람의 발흥으로 3개 대교구가 사라센제국의 영역으로 들어가 동방의 세력이 약해졌다. 반면 서방 교회는 야만족으로 여겨왔던 프랑크족을 비롯한 게르만족 정치권력과 손을 잡으며 힘을 키웠다. 언어와 문화, 정치체계의 변화 속에 신학 논쟁도 연달았다. 성 만찬에서 발효된 빵 취식과 사제의 자격과 혼인, 성상 숭배, 성령에 대한 해석을 놓고 동서는 치열한 논쟁을 펼쳤다. 둘은 484년과 864년에도 분열 위기를 겪었지만 가까스로 ‘하나된 교회’를 지켜왔다. 상호 파문의 결정적 계기는 노르만족의 남이탈리아 침공. 기대했던 동방의 지원 병력이 오지 않아 패전한 서방은 이를 갈았다.



노르만족이 형식적으로 콘스탄티노플 교구 소관이던 점령지를 로마 교구로 바꾸자 이번에는 동방이 분노하고 교황은 사절단을 보냈다. 사절단도 고분고분하지 않았지만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는 이들을 3개월 동안 박대해 ‘파문’이라는 화를 스스로 불러들였다. 동서교회의 결별 뒤에도 통일 노력이 없지 않았으나 1204년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과 약탈로 둘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동서분열 뿐이랴. 교회는 신·구교 분열을 비롯해 수없이 많은 분파로 갈라졌다. 한국에는 교파가 유난히 많다. 궁금하다. 하늘의 뜻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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