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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1791년 마르스 광장의 학살

또 다른 피를 부른 유혈진압

라파예트 사령관의 명령을 받은 국민위병대가 군중에 사격하는 그림. /위키피디아




1791년 7월17일 프랑스 파리 마르스 광장(Champ de Mars). 이른 아침부터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입헌의회가 이틀 전 발표한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시위였다. 군주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영국식 민주주의를 원하던 시위대의 규모는 약 3,000명. 치안을 맡은 국민위병대와 가볍게 충돌했으나 곧 흩어졌다. 의회 지도자들은 지지 시위에 웃었으나 끝이 아니었다. 오전 시위 소식에 자극받은 공화제 지지자들이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일부 군중은 루이 16세 퇴위와 공화제 청원 서명지를 돌렸다. 약 6,000여명이 청원서에 이름을 올렸다.

대다수의 파리 시민들이 국왕의 퇴진을 요구한 것은 ‘외세의 앞잡이’로 인식했기 때문.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야밤에 프랑스를 빠져나가려다 붙잡힌 직후여서 왕실에 동정적이던 계층마저 공화제 선호로 돌아섰다. 사흘 전 마르스 광장에서 열린 혁명 2주년 기념행사에서도 파리 시민들은 루이 16세 부부를 연호하기는커녕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입헌의회는 ‘왕이 탈출을 시도한 게 아니라 잠시 납치됐을 뿐’이라며 입헌군주제를 밀고 나가 공분을 샀다. 시내 곳곳에 왕의 퇴진과 공화제 지지 격문이 나붙었다.



마르스 광장에 모인 시위대가 5만명으로 불어난 오후2시 무렵부터 심상치 않은 충돌이 꼬리를 물었다. 시위대가 국민위병대에 돌을 던졌다. 국민위병대는 말 그대로 파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치안 조직. 2년 전 바스티유 감옥 습격 직후 만들어졌다. 대원 대부분이 봉기에 적극 가담했던 터라 공화제 지지자가 많았다. 사령관은 미국 독립전쟁에서 위명을 날린 라파예트 후작. 고위 귀족이지만 혁명의 대의에 찬동해 시민들의 인기를 끌었던 라파예트 후작은 이날 시위 진압에서 예상하지 못한 명령을 내렸다. ‘사격 개시.’

국민위병대는 봉기의 동지였던 시민을 겨냥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다. 흥분한 군중이 더 밀고 들어오자 직접 사격이 시작됐다. 시위대는 바로 도망쳤으나 광장에는 시신이 남았다. 사망자만 50여명이 발생한 마르스 광장의 학살은 프랑스 혁명의 물줄기를 바꿨다. 시위를 진압한 의회는 급진세력에 책임을 물어 정치행위를 금지했지만 파리의 민심을 완전히 잃었다. 정치투쟁 속에 초강경 공화파가 권력을 잡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죽였다. 국왕 부부는 물론 수많은 귀족과 부르주아의 목이 단두대에서 잘렸다. 유혈 진압이 아니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총칼에 의한 압제의 효과는 일시적일 뿐이다. 피는 피를 부르기 마련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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