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경쟁 속에서 남들보다 뒤처지고 싶지 않은 마음,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증, 자칫 실수라도 할까봐 조급한 마음, 미움 받지는 않을까 겁나는 마음 등 온갖 복잡한 감정들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겉은 모두가 멀쩡해 보이지만 말이다.
특히 매일 출근을 하고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며 평가를 받아야 하는 직장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마음의 병은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회사생활에까지 큰 지장을 주어 결국 퇴사까지 고민하게 만들곤 한다.
혹자는 ‘건강이 우선이다’, ‘과감히 떠나라’라고 조언할지 모르지만 연봉 보다 높은 대출금에 각종 공과금과 생활비 등으로 매달 빠져나가는 비용을 생각한다면 현실적으로 퇴사를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기업에 다니는 한 대리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날 회의 도중 숨이 막혀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은 극심한 공포를 느낀 그녀는 그길로 회의실을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도 불안장애로 힘든 하루하루가 계속됐지만 그녀는 퇴사를 선택하지 않고 심리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하며 지금도 회사에 출근하고 있다.
이 같은 한 대리의 실제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 책 <불안장애가 있긴 하지만 퇴사는 안 할 건데요>는 오늘도 힘겹게 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직장인들을 위해 퇴사가 아닌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담았다. 처음에 독립출판도서로 출간됐던 이 책은 독자들의 꾸준한 입소문을 타고 사랑받기 시작해 결국 최근에는 대형출판사 위즈덤하우스를 통해 다시 출간됐다.
다음은 ‘한 대리’ 저자와의 일문일답.
▲ 스스로에게 ‘불안장애 회사원 홍보대사’라는 재미있는 닉네임을 붙였던데,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기까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다. 어떤 계기로 책 출간을 결심하게 되었나?
- 한 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글을 쓰게 된 것은 내 마음을 좀 더 잘 들여다보고, 불안하고 우울한 마음에서 빠져나왔을 때 객관적으로 이를 돌이켜보기 위함이었다.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있을 때에는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크기나 중요성을 판단하기가 어렵다.
내 이야기를 책으로 내게 된 계기는 우울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회사원'의 이야기를 많이 접할 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나는 무언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으면 서점에 가서 책을 먼저 구입하곤 하는데,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등과 관련된 에세이를 읽어보면 대부분 퇴사를 선택한 분들이 많았다. 어느 정도 공감은 되지만 결국 끝에 이르러서는 '그러면 나는 결국 회사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걸까?' 하는 마음이 들어 괴로워지기도 했다. 어떤 생활 방식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책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내가 쓴 글을 책으로 내게 되었다.
▲ 처음 증상이 발현되기 시작한 상황이 궁금하다. 어떤 상황이었고, 그런 자신의 상황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 어떤 심정이었나?
- 사실 처음 불안장애 증상이 발현된 것이 언제인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도 무척 어린 시절이었을 것 같다. 중학교 때 병원에 가서 심전도 검사를 했던 에피소드를 책에 담았는데, 그 때가 처음으로 '뭔가 이상이 있구나'라고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또한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돌이켜 생각하게 된 것이지 막상 증상을 심하게 겪고 있을 때에는 거의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할 만한 정보도 그 당시에는 부족했다.
▲ 책에는 상담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한 걸로 나오던데 불안장애를 극복하는데 각각 어떤 도움이 되었나?
- 심리 치료는 내가 스스로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살아가면서 계속 마음속에 지니고 있어야 할 지침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내 마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공부를 하는 시간이었다.
인지행동치료를 통해 '나는 습관적으로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으며 - 어떤 점이 실제와는 거리가 있고 - 생각하는 방식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를 훈련했다.
예를 들면 '업무 중 동료에게 작은 실수를 했다 - 저 사람은 영원히 날 싫어할거야'라는 생각에서 '업무 중 동료에게 작은 실수를 했다 - 같은 실수를 저 사람이 했다면 나는 저 사람을 싫어했을까?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을거야 - 그럼 내 실수에 대해서만 사과하고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야'라고 생각을 전환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심리치료 전에는 누구에게도 내 마음을 온전히 털어놓은 적이 없었는데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솔직히 이야기하는 경험이 굉장히 소중하면서도 동시에 버거웠던 기억이 난다. 처음 해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심리치료 이후에는 무작정 화를 내거나 우는 대신 내가 느끼는 분노나 슬픔에 대해서 상대방에게 차분히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나 같은 경우 심리치료를 먼저 접하고 약물치료를 병행했기 때문에 약물치료만 진행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나는 심리치료로 극복하지 못한 '신체화증상(땀이 난다거나, 숨이 차고 잠을 못자는 등의 증상)'을 극복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마음을 다루는 훈련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신체적으로 컨디션이 너무 떨어지면 혼자 극복하는 데 한계가 있더라. 가장 중요한 수면 장애를 약물로 극복하고 나니 상담치료도 훨씬 더 빨리 효과를 볼 수 있었다.
▲ 회사생활을 버티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과감히 퇴사를 하거나 아니면 잠시 휴직을 신청하는 등의 방법도 선택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 현실적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퇴사는 고려해보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금전적으로 망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많이 가지고 있던 편인데, 퇴사는 오히려 이러한 불안 증세를 악화시킬 거라고 생각했다.
또 수면이나 섭식과 관련된 좋지 않은 습관들이 전혀 개선되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를 그만둔다면 혼자서 규칙적인 생활을 이어나갈 자신이 없었다. 회사원으로서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고정적인 생활 패턴을 (억지로라도) 유지시켜준다는 점이다.
▲ 회사에서 스스로를 가장 힘들게 만들었던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 사람에게 미움 받기 싫은 마음, 미워하기 싫은 마음, 혼날까봐 두려운 마음이 가장 힘들었다. 그 기저에는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인정받는 나'에 대한 집착이 깔려있었던 것 같다.
▲ 갑자기 일을 하다가 불안감이 엄습할 때 임시방편으로 취하는 본인만의 노력이나 의식이 있는가?
- 갑자기 불안이 엄습할 때면 잠시 업무에서 손을 떼고 신체 상태에 변화를 준다. 산책을 나가거나 자리에서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기도 하고 그마저도 어려울 때에는 잠시 눈을 감고 깊게 호흡을 한다. 불안으로 경직된 몸을 이완시키면 마음도 같이 느슨해지는 것 같다.
▲ 이 책을 읽고 난 후 독자들이나 가까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
- 반응이 정말 제각각이었는데, 친한 친구들은 슬퍼하고 속상해하기도 했다. 그동안 내가 겪고 있던 어려움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서운해 하기도 했다. 아마 오랜 세월을 같이 지내면서도 나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담긴 서운함이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대견하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하나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심지어 회사를 다니며 바쁜 와중에 책까지 쓴 노력에 대해 칭찬을 많이 받았다(웃음).
물론 사교적이고 밝은 내 성격에 익숙한 몇몇 친구들은 '소설 아니냐'고 하기도 했다. 흔한 편견이었다.
독립출판 버전의 제 책을 읽은 독자들은 '힘내라'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해주셨다. 아무래도 그 때는 심경을 토로하는 마음으로 나의 꿈이나 몽상 같은 것들까지 전부 담았기 때문에 위로가 되기보다는 작가인 내가 걱정이 되셨던 모양이다(웃음). 특히 내 책을 모티브로 한 노래를 보내주신 분도 계셨는데, 정말 인상적이었다.
이번에 다시 책을 내고 난 뒤에는 회사생활 관련한 내용이 특히 공감이 간다고 해주셨다. 책을 읽으며 울었다고 하신 분들도 많다. 마지막에는 좀 더 나아진 한대리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서 용기를 내게 되었다고 말씀해주신 고마운 분도 계셨다.
▲ 다행이 책 말미에는 예전보다 증상이 많이 좋아진 걸로 나오던데, 지금은 건강이 어떠한가?
- 완전히 잘 지내고 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신체적으로 불편한 것은 많이 나아졌다. 여전히 마음은 출렁이지만 제 마음과 많이 이야기하고 잘 지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마 평생 이 노력은 해야 할 것 같다.
▲ 오랫동안 치료를 받고 극복해나가면서 가장 힘이 되어준 존재는 누구인가?
- 남편이다.(안 쓰면 서운해 할 것 같다) 사실 감정적으로 남편에게 기대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혼자서도 괜찮을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완전히 성공한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상담 과정을 겪으며 가끔 포기하고 싶거나 약물 복용과 관련해 걱정되는 부분이 있을 때 솔직하게 이야기 나누고 용기를 준 사람은 남편이었다.
▲ 각자 증상과 병명은 다르지만 지금 어딘가에는 마음의 병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직장인들이 아주 많을 것 같다.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가?
- 나는 '퇴사는 안할 건데요'라고 쓰기는 했지만 각자에게 맞는 생활과 삶의 양식이 있을 것 같다. 다만,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시든 스스로를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김동호 기자 dongho@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