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더 이상 개발도상국이 아닙니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스토리를 갖고 있고 이런 측면에서는 미국이나 호주와 비슷합니다.”
지난 200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30일(현지시간) 서울경제신문 창간 60주년 단독 인터뷰에서 “20여년 전 한국은 분명히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그것은 한국이 지금보다 훨씬 외화부채에 의존하는 다른 나라였을 때”라며 이같이 말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대표적인 진보 성향의 경제학자다. 그는 한국의 위상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 만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수준을 전제로 정부의 개입을 좀 더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우리가 부채 문제를 완전히 무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라면서도 지금과 같은 저금리에서는 부채 증가에 따른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고 실제로도 위기가 올 가능성이 낮다고 설명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은 부채비율이 높으면 외국인투자가들이 이탈할 수 있다고 하자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답했다. 한국의 덩치가 커져 예전보다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커졌다는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외국인투자가들이 한국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봅시다. 통화가치가 떨어지겠지만 이는 그렇게 끔찍한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로 일정 부분 부채 부담을 줄여줍니다. 통화가치 하락으로 인플레이션이 생길 수 있지만 그렇게 높지는 않을 것입니다. 미국 같은 나라가 부채위기를 겪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이는 한국에도 들어맞는 얘기입니다.” 기축통화국인 미국과 국가부채비율이 238%인 일본도 아직 부채위기가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다만 그는 미국 경제가 약해지고 있으며 이것이 달러 약세로 표출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날 나온 미국의 2·4분기 경제성장률은 -32.9%(전기 대비 연환산 기준)로 73년 만에 최악이었다. 크루그먼 교수는 “지금의 약달러와 금값 상승은 미국 경제의 약점에 대한 시장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며 “사람들은 미국 경제가 오랫동안 약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어 “이들은 금리가 계속 낮을 것으로 예상하는데 이는 달러가 매력적인 투자처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며 금이 대신 살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위안화가 달러를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게 크루그먼 교수의 생각이다. 그는 “글로벌 통화가 되기 위해서는 유동성이 충분해야 하며 거래가 자유롭고 어떤 상황에서도 거래를 막는 임의적인 조치가 부과되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필요하다”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중국은 널리 개방된 금융시장을 갖고 있지 않으며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운 시장이 아니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미중 관계에 대해서는 오는 11월 미국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에도 갈등이 계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크루그먼 교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과의 무역관계를 비난하고 정치적 경쟁자를 중국과 가깝다고 하는 것은 명백히 선거를 겨냥한 정치적 전략”이라며 “하지만 이것이 (쌓이면) 중국과의 관계에 실질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또 “중국 역시 경제적 이익보다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게 더 중요한 나라가 됐다”며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당선되면 무턱대고 중국에 관세를 부과하지 않을 것이고 모든 것을 중국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중 간에는 지적재산 같은 이슈가 있고 이 때문에 상당한 마찰이 있을 것”이라고 점쳤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미중 갈등은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민주당 대선 후보인 바이든 전 부통령의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전략은 “보호무역주의 성격이 있다”면서도 바이든 캠프에서 이를 내세운 것은 환경 같은 진보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표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크루그먼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는 외국인 혐오증을 바탕으로 국내 정치에 활용된다”며 “바이든 캠프의 경우 노동계를 강하게 대표하기는 하지만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정책국장 같은 강경파나 외국인을 싫어 하는 사람은 없다”고 전했다. 이어 “환경정책을 팔려면 민주당은 우리가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말해야 한다고 본다”며 “바이든 전 부통령 입장에서는 세계주의자처럼 보이려고 애쓰고 싶겠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적 자산이 부족하다. 그래서 바이 아메리칸을 꺼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를 고려하면 정권교체 시 트럼프 정부 때보다는 보호무역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할 것이라는 게 크루그먼 교수의 예상이다. 그는 “2020년 미국 정치 현장에서 글로벌리스트가 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면서도 “그럼에도 (바이든 전 부통령 당선 시) 세계가 사업을 하기에 훨씬 안전한 곳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의 경기회복은 코로나19에 달려 있다고 봤다. 그는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는 엄청난 악성부채를 지고 회복해야만 했던 과거 불황과는 다르다”며 “미국 정부가 코로나19 대응 초기 두 달간 실수를 했기 때문에 L자형 회복이 될 것”이라고 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미국은 바이러스 확산이 크게 줄어들 때까지 주요 분야를 계속 봉쇄해야 했고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만 했다”며 “하지만 많은 미국인이 술집과 체육관·교회를 다시 열었고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가 잡힌다면 경제가 매우 빠르게 회복되겠지만 문제는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하루에 1,000명에 달하는 상황에서는 우리가 그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장선상에서 그는 지금 미국 경제는 물가상승률이 계속해서 감소하는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코로나19는 기본적으로 수요 급감에 따른 디스인플레이션 쇼크라고 한 것을 두고 “실제로 그렇다”며 연준의 대규모 유동성에도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우리가 백신을 갖게 되거나 한국이나 독일·뉴질랜드처럼 추적·격리제도를 시행하기 전까지는 경기가 지속적으로 약세를 보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고용시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백신이 개발되더라도 보급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데 사람들이 주사를 맞기 위해서는 이것이 안전하다는 믿음이 생겨야 한다”며 “고용시장이 내년 말 이전에 돌아올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했다. 일러야 내후년 초 이후에나 단계적인 회복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저임금 노동자를 정부가 집중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게 크루그먼 교수의 생각이다.
“경제위기 때 최악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더 고통을 받습니다. 문제는 정치예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회안전망을 만들고 그중에서도 저임금 노동자처럼 가장 어려운 이들에게 지원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현재 미국은 소비를 떠받치는 핵심요인인 600달러의 추가 실업수당 지급 연장을 두고 공화당과 민주당의 의견이 갈려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크루그먼 교수는 코로나19가 세계화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이동성”이라며 “많은 이들이 코로나19로 비행기를 탈 계획이 없다. 이는 세계화를 저해할 것같이 보인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코로나19가 완전히 끝나면 세계가 다시 이전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도 봤다. 비대면 업무와 생활이 처음에는 편리한 듯했지만 결국 과거의 삶을 원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크루그먼 교수는 “코로나19 이후 사람을 만나던 것을 대체하기 위해 화상회의 같은 원격 방식을 사용했고 처음 몇 달 동안은 이게 더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면서도 “몇 달이 지난 지금 우리는 모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예를 들어 온라인이 아닌 복도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게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잃게 됐는지 깨닫기 시작했다”며 “내 생각에는 지금으로부터 5년 후의 세계는 코로나19 이전의 세계와 훨씬 더 비슷해 보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김영필특파원 susopa@sedaily.com
1974년 예일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MIT와 프린스턴대 교수 등을 거쳐 지금은 뉴욕시립대에 적을 두고 있다. 2000년부터 뉴욕타임스(NYT)에 칼럼을 게재해온 그는 케인스 이후 가장 글을 잘 쓰는 경제학자로 꼽혀왔다. 서울경제신문 ‘해외칼럼’에도 매주 그의 글이 소개되고 있다. 그의 책 ‘불황의 경제학’과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 ‘국가는 회사가 아니다’ 등은 국내에서도 큰 관심을 받았다.
1991년에는 미국 경제학회가 40세 미만의 경제학자에게 주는 존 베이크 클라크 메달을 받았고 2002년에는 올해의 칼럼니스트로 선정되기도 했다.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에는 국제무역과 경제지리학 분야 연구를 통합해 자유무역과 세계화가 어떤 영향을 가져왔는지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 점을 인정받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