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력원자력의 월성1호기 폐쇄 결정에 대한 감사와 관련해 감사원이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불리한 쪽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의혹이 일자 청와대와 여권이 최재형 감사원장을 강하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최 원장을 둘러싼 논란이 ‘제2의 윤석열’ 사태로 확산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현 정부의 국정철학에 조금이라도 반하는 인사는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 국가 의전 서열 10위권 고위급도 순식간에 ‘적폐’가 되는 게 맞느냐는 논란도 일고 있다.
송갑석 “최재형 원장, ‘文대통령이 시키면 다하냐’고 말해”
월설1호기 원전 폐쇄 결정 관련 감사를 둘러싸고 최재형 감사원장에 대한 공세가 본격화된 것은 송갑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폭로가 그 시발점이 됐다. 송 의원은 지난 23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최 원장이 ‘대선에서 41%의 지지밖에 받지 못한 정부의 국정과제가 국민의 합의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등 국정과제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발언을 했다”며 “감사원장이 이런 발언을 해도 되느냐”고 정세균 국무총리에게 물었다. 정 총리는 이에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뭐라고 평가하기가 어렵다”고 답했다.
이어 최근 감사원 조사를 받았다는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 26일 한 언론을 통해 “(송 의원이) 최재형 감사원장이 한 발언이라고 소개한 내용은 모두 사실”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백 전 장관은 “최 원장이 지난 4월9일 감사위원회 직권심리를 주재하면서 2017년 고리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문 대통령이 ‘월성 1호기는 전력수급 상황을 고려해 가급적 빨리 폐쇄하겠다’고 밝힌 것을 두고 ‘한수원 사장이 할 일을 대신 한 것’, ‘대통령이 시킨다고 다 하냐’는 발언도 했다”고 전했다.
송 의원은 29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청와대가) 어떤 사람을 추천했는지 모르겠지만 최 원장이 ‘친정부 인사이기 때문에 못 한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했다고 한다”고 주장했다. 최 원장이 청와대가 추천한 김오수 전 법무부 차관을 감사위원으로 제청하길 거듭 거부했다는 언론 보도를 두고 한 말이었다.
송 의원은 한국수력원자력의 월성1호기 폐쇄 관련 감사와 관련해 “(감사원이) 무리하게 경제성으로만 초점을 맞춰서 그 결정이 잘못됐다고 일방적으로 몰아가고 있다”며 “산업부 강압적인 행정지도는 이 정부의 문재인 정부의 소위 말하는 탈원전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 진행됐다고 하는 일정한 구도와 시나리오를 가지고 감사에 착수했다”고 의심했다.
“임명권은 文” “사퇴하라” “탄핵감”... 靑·與 총공세
송 의원과 백 전 장관이 쏘아 올린 최 원장에 대한 압박은 곧바로 청와대와 여당 의원들의 지원 사격으로 이어졌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29일 청와대가 김오수 전 차관을 감사위원에 임명하려다 ‘친정부 인사’라는 이유로 최 원장이 거부했다는 보도에 대해 “인사에 관련한 사안은 확인하지 않는다”면서도 “감사위원 임명권은 대통령에게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고 강조했다. 사실관계에는 말을 아끼면서도 최 원장에게는 경고장을 날린 듯한 발언이다.
이날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도 여당 의원들은 최 원장을 잇따라 질타하며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신동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 원장이 지난 4월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직권심문 과정에서 ‘대선에서 41% 지지밖에 받지 못한 정부의 국정과제가 국민의 합의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과 감사위원에 추천된 김 전 차관을 거부했다는 언론 보도에 대해 강하게 추궁했다. 신 의원은 “대선에 불복하는 반헌법적 발언”이라며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향이 불편하고 맞지 않으면 사퇴하고 재야로 나가서 비판하든지 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진애 열린민주당 의원은 최 원장의 친인척이 보수 언론사와 국책 원자력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는 사실을 거론하며 “국민이 탄핵에 이를 사안인지 판단하겠지만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민주당 소속의 윤호중 법사위원장은 최 원장의 답변 태도를 문제 삼으며 “지금 팔짱을 끼고 답변하느냐”고 지적하기도 했다. 최 원장에 대한 비판에는 민주당의 박범계·송기헌·소병철 의원 등도 가세했다.
최 원장은 이에 대해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은 공약이라는 주장에 ‘41% 지지율을 국민 대다수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한 게 전부”라며 “정치권의 눈치를 봤다는 비난은 피해야 한다는 게 우리 생각”이라고 해명했다. 감사위원 추천 논란에 관해서는 “임명권자와 협의해 결정하는 게 순리”라고 답해 문 대통령에게 결정권이 전적으로 있는 듯 강조한 청와대와 다소 다른 답변을 내놓았다.
조기숙 “박근혜 데자뷔”, 진중권 “뭔가 걸렸나”
최 원장을 향한 청와대와 여당의 반응은 즉각 각계 인사들의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최 원장에 대한 현 정부의 반응이 박근혜 정부 시절 양건 전 감사원장의 사퇴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고 비판했다.
조 교수는 지난 30일 페이스북에서 “여러 번 정권교체의 경험은 역지사지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정치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게 대다수 학자들의 생각이지만 현실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며 “박근혜 정부의 한 사건이 데자뷔처럼 떠올랐다”고 꼬집었다.
조 교수는 “(양 전 원장이 외압으로 사퇴할) 당시 민주당은 ‘청와대는 감사원에 대한 인사 개입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며 “헌법 학습에 대한 기대는 둘째 치고 민주당은 지난 정부에서 자신들이 했던 말만 기억하고 그대로 실천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감사원은 대통령 산하의 행정기관이 아니라 행정부를 견제하는 독립기관이고 따라서 헌법에 감사원장의 임기와 감사위원 인사 제청권이 보장돼 있다”며 “인사의 교착상태는 헌법정신에 입각해 순리대로 풀어야지 감사원장을 겁박하고 사퇴 운운하는 게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일인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조 교수는 또 “청와대와 민주당은 박근혜 정부보다는 나은 정부를 위해 그 추운 겨울에 촛불을 들었던 국민을 생각해주면 좋겠다”며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자랑스러울 때가 훨씬 많았지만 견제받지 않는 거대 권력의 탄생으로 그 동안 쌓아올린 민주주의를 잘 지킬 수 있을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탄핵당한 정부가 왜 민심과 멀어지게 되었는지 생각해보길 간청한다”며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문재인 정부의 성공이나 민주주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27일 페이스북에 관련 기사를 첨부한 뒤 “갑자기 왜 감사원장을 공격하고 나선 건가”라며 “혹시 감사에서 뭔가 걸렸나”라고 비꼬았다. 이어 “이 사람들 평소 하는 짓을 보면 수틀리면 감사원장도 갈아치울 사람들”이라며 “대체 뭐가 나오려고 하길래 미리 변죽을 울리는 건지 궁금하다”고 비판했다.
윤석열 사태와 닮은 꼴... 정쟁 갈등 확산 우려
일각에서는 최 원장의 현재 처지가 윤석열 검찰총장과 닮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취임 당시만 해도 여권 인사들의 찬사를 듣다가 정권에 반하는 모습을 보이자 순식간에 ‘문제 인사’로 압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야권과 보수 진영에서 그의 행동을 ‘소신’으로 간주해 평가하는 부분도 윤 총장과 비슷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 원장은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지낸 법관 출신으로 2017년 말 문재인 정부 첫 감사원장에 임명됐다. 인사청문회 당시 민주당은 최 원장을 ‘미담 제조기’라며 극찬했고 최 원장은 흠잡을 데 없는 도덕성을 앞세워 무난히 청문회를 통과했다.
황규환 미래통합당 부대변인은 27일 논평에서 “독립성이 보장돼야 할 헌법기관인 감사원의 수장에 대해 상식적인 발언을 빌미로 아랫사람 다루듯 하려는 태도는 탈원전 정책 감사로 인한 불만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월성1호기 원자력발전소 조기 폐쇄 결정에 대한 타당성 감사 결과는 현재 예정 기한을 다섯 달 가까이 넘겼다. 감사원은 앞서 4월9일과 같은 달 10일·13일 잇따라 관련 감사위원회를 열어 감사보고서 발표에 대한 기대를 높였지만 결국 결론을 내리는 데는 실패했다.
최 원장은 지난 6월5일 이례적으로 언론보도들에 대한 입장을 내고 “나를 비롯한 감사원 구성원들은 언론의 이러한 보도들이 직무상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확고히 지키며 법과 원칙에 따라 감사를 수행하여 헌법과 법률에 의해 주어진 감사원의 사명을 다하라는 국민의 기대와 우려를 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법과 원칙에 따라 철저히 조사하여 빠른 시일 내에 월성1호기 감사를 종결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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