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심의위원회가 지난 6월26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에 대한 수사를 중단하고 불기소 처분하라고 권고했지만 검찰은 45일째 묵묵부답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글로벌 경영환경이 급변하는 시기에 생존을 위해 리더십 정상화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검찰의 침묵 탓에 끝이 보이지 않는 ‘희망고문’만 이어지고 있다.
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경제범죄형사부(이복현 부장검사)는 지난달부터 경제학자 등 전문가들을 불러 이 부회장 등에 대한 기소와 관련해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수사팀은 1년8개월 동안의 수사를 마무리하고 공소장 제출만 남겨둔 상태지만 검찰은 판단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검찰 안팎에서는 차장검사·부장검사 등 주요 인사가 마무리되는 이달 중순 이후에야 수사팀이 결론을 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삼성은 극도의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2016년 말부터 이어진 특검 수사와 재판으로 정상적인 경영이 어려운 상황이 4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2017년 1월 특검의 첫 소환조사 이후 지금까지 총 10차례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또 경영권 승계 의혹 수사로 100명이 넘는 삼성 임직원들이 430여차례 소환조사를 받았고 압수수색도 50여차례 진행됐다. 검찰이 만약 이 부회장을 기소한다면 이 부회장은 또다시 2~3년간 법정을 수십차례 오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재계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사법 리스크’가 하루빨리 해소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대규모 투자나 인수합병(M&A) 등 굵직한 경영적 결단은 그룹 총수인 이 부회장의 몫이라는 것이다. 삼성의 반도체 신화를 이끈 권오현 삼성전자 상임고문 역시 최근 “전문경영인은 적자가 나거나 불황인 상황에서 수조원을 투자하는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며 “어려운 시기에 제일 중요한 것은 강력한 리더십”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檢 여전히 침묵…'희망고문' 계속돼 경영활동 위축
지난 2016년 12월 21일.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보건복지부·국민연금관리공단 기금운용본부에 대한 압수 수색을 시작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정부 기관에 대한 압수수색이었으나 실제 대상은 삼성그룹.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지배구조 개편의 핵심 작업으로 알려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을 들여다보기 위해서였다. 이후 이 부회장은 수사 과정에서 수차례 소환조사를 받았다. 특히 특검의 두 차례 구속영장 청구 끝에 구속됐다. 이 부회장이 1년여 만에 석방되고 2년여가 지났으나 삼성의 상황은 달라진 게 없다. 국정농단 사태에 따른 재판이 현재 진행형인 가운데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등 불법 경영권 승계 의혹으로 이 부회장 등이 또다시 재판에 넘겨질지 모르는 처지에 놓이며 오히려 사법 리스크가 커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사태로 국내외 경제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삼성이 ‘수사→기소→재판’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뫼비우스의 띠’에 갇힌 모양새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혐의 입증 여부와 관계없이 오랜 기간 사정기관의 수사를 받고 또 재판에 대비해야 한다는 건 기업 입장에서는 곤욕이 아닐 수 없다”며 “검찰이 삼성 불법 승계 의혹 수사 과정에서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에 실패한 뒤 ‘무리한 기업 흔들기’가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유례없이 긴 수사 기간”이라고 지적했다.
◇심의위 의견에 ‘답’ 없는 檢…희망고문 빠진 삼성=지난 6월 26일 삼성 측에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검찰수사심의위원회가 이날 회의를 열고 이 부회장 등에 대해 ‘수사 중단 및 불기소’로 의견을 모았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삼성 측은 이 부회장 등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에 이어 수사심의위원회 개최 결정, 심의위원 논의 결과까지 연승 행진을 이어갔다. 하지만 검찰이 수사심의위 의견에 침묵을 지키면서 상황은 그대로다. 오히려 삼성 측은 ‘이 부회장 등에 대한 수사를 중단하고, 불기소 처분을 내리지 않을까’하는 희망고문에 빠졌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이르면 10~14일 사이 검찰이 입장 표명할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온다. 하지만 검찰 인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터라 그 시기가 이달 말로 늦춰질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그만큼 삼성 측 희망고문은 길어질 가능성이 크다.
또 다른 법조계 관계자는 “검찰이 장고를 거듭할수록 기업이 느끼는 고통도 커질 수 있다”며 “지금이라도 판단을 내리고, 겸허히 국민적 평가를 받는 게 검찰 입장에서도 바른길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검찰이 선택할 수 있는 답안지는 3가지. 수사심의위 의견에 반해 이 부회장 등을 기소할 수 있으나 이는 국민적 신뢰만 떨어뜨릴 수 있다. 또 기소유예를 선택할 경우에는 법적 논란만 가져올 수 있다. 기소유예란 검사가 형사사건에 대해 범죄의 혐의는 인정하나 피의자의 범행 후 정황 등을 참작해 공소를 제기하지 않는 처분. 형법 51조(양형의 조건)에 명시한 △범인의 연령, 성행, 지능과 환경 △피해자에 대한 관계 △범행의 동기, 수단과 결과 △범행 후의 정황이 판단 근거다. 수사심의위 의견이 이들 가운데 하나로 판단해 기소유예해야 하지만 이는 무리한 자의적 해석이라는 비판을 가져올 수 있다. 그렇다고 기소를 포기하면 검찰은 그동안 수사가 ‘도로아미타불’ 되면서 스스로 무능만 인정하는 셈이 된다.
◇노조와해 2심·재판부 기피까지…산 넘어 산=삼성의 사법 리스크는 이뿐이 아니다. 10일에는 삼성전자서비스의 노동조합을 와해하려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상훈 전 삼성전자 의사회 의장 등 삼성그룹 주요 임원들의 항소심이 열린다. 서울고법 형사3부(배준현 부장판사) 심리로 열리는 선고 공판에 앞서 검찰은 이 전 의장을 비롯해 강경훈 삼성전자 부사장, 목장균 삼성전자 전무 등에게 징역 4년을, 박상범 전 삼성전자서비스 대표에게는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기소 위기에 처한 이 부회장은 물론 삼성 전·현직 임직원까지 법원의 심판대에 오르는 등 사법 리스크가 한층 커진 모양새다. 아울러 박영수 특검 측이 파기환송심 재판부에 제기한 기피신청의 재항고에 대한 판단도 이르면 9~10월께 예상된다. 대법원은 서울고법에 이 부회장 재판과 관련한 자료를 제출받는 등 현재 심리를 진행 중이다. 앞서 특검팀은 “파기환송을 심리하는 서울고법 형사1부(정준영 부장판사)가 삼성 준법감시제도 도입을 먼저 제안하고, 이를 양형 감경 사유로 삼으려 하는 등 일관성을 잃은 채 편향적 재판을 진행한다”며 기피신청을 냈다. 하지만 기각되자 특검팀은 재항고했다. 파기환송심은 여전히 중단된 상태다.
◇포스트 코로나 대비해야 하는데=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선점하기 위한 글로벌 기업들의 경쟁이 뜨거운 가운데 삼성은 수년째 사법 리스크에 발목이 잡혀 있다. 삼성은 지난 2016년 12월 특검의 수사가 시작된 후 햇수로 5년째 수사를 받고 있다. 이 가운데 불법 승계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 기간만 1년 8개월째다. 특히 재계 안팎에서는 검찰이 이 부회장 기소를 강행할 경우 삼성의 정상적 경영이 크게 위축될 수 있다는 데 힘이 실리고 있다. 이 부회장 재판이 집중심리로 매주 2~3회 열릴 경우 재판 출석과 준비를 위해 기업활동에 집중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앞서 특검의 기소로 2017년에 열린 국정농단 1심 재판에 이 부회장은 총 53차례나 출석했다. 이 재판은 3년이 넘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검찰의 기소 강행으로 새 재판이 열릴 경우 또 4~5년이 걸릴 수 있다. 삼성의 잃어버린 10년이 우려가 아닌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는 삼성의 대규모 인수합병(M&A)은 물론 ‘2030년 시스템반도체 1위에 오른다’는 ‘반도체 비전 2030’ 달성까지 가로막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삼성이 대규모 M&A를 한 건 미국 전장 업체 하만을 9조3,000억원에 인수한 지난 2016년 11월이 마지막이다. 공교롭게도 이는 특검 수사가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애플·아마존·마이크로소프트(MS)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코로나19 위기를 기회 삼아 공격적 M&A에 나서고 있지만 사법리스크에 발목을 잡힌 삼성은 이 같은 경쟁에서 상당 기간 뒤처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반도체 사업에 필수적인 수조~수십조원 단위의 대규모 투자 결정은 총수만이 할 수 있다”며 “이 부회장이 만약 기소돼 연일 법정에 서게 될 경우 삼성전자의 선제적 투자가 주춤해지면서 대만 TSMC 등 경쟁업체만 반사이익을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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