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금산에서 인삼농사를 짓는 청년창업농 박서현(39)씨는 요즘 애지중지하던 인삼밭을 바라볼 때마다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기분이다. 얼마 전 내린 폭우로 경작하던 인삼밭 인근 태양광시설의 토사가 무너져 내리면서 밭이 매몰됐기 때문이다. 태양광 업체에 피해보상을 요구하자 돌아온 것은 “자연재해이니 군청에서 보상을 받으라”는 말뿐이었다. 다시 군청에 항의하자 이번에는 “자연재해로 보기 어렵다”며 업체에 책임을 떠넘겼다. 박씨는 “무려 7년 넘게 힘든 일도 참아가며 수확할 날만 기다려왔는데 산사태로 모두 물거품이 됐다”며 “인위적으로 산을 깎아 만든 태양광시설이 무너져내려 피해를 당했는데 자연재해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울분을 터뜨렸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담은 글을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올렸다.
계속되는 집중호우에 제5호 태풍 ‘장미’까지 한반도에 상륙했던 지난 10일 충남 금산군과 충북 제천시 등 전국 각지에서 태양광시설 인근 산사태로 농작물 피해를 당한 농민들은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길게는 수년 넘게 자식처럼 공들여 길러낸 농작물이 한순간에 모두 흙더미에 파묻힌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충북 제천시 대랑동에서 만난 주민 김모(65)씨 역시 인근 태양광발전소에서 쏟아진 토사로 뒤덮인 밭을 바라보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김씨는 “이곳에서만 40년을 살았는데 이렇게 산사태로 무너져내린 적은 처음”이라며 “3년 전 인근 뒷산에 태양광발전소가 생긴 뒤로는 비만 오면 청개구리처럼 밖에 나가 울고 싶을 정도로 답답하고 불안한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군청이 태양광발전 허가를 내줬으면 사후관리도 함께 신경 썼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잇따라 터져 나오고 있다. 일부 주민들은 태양광 업체를 상대로 한 소송도 준비하고 있다.
“태양광 만들면서 물길 변해…올해만 벌써 세번 토사 덮쳐”
금산은 국내 최대 인삼산지 중 한 곳이다. 10일 금산군 제원면 동곡리에서 만난 박서현(39)씨도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서 인삼을 재배하고 있다. 그는 미래 농업을 이끌어갈 ‘청년창업농’에도 선정될 만큼 인삼 재배에 남다른 열의를 보였지만 얼마 전 폭우와 함께 인근 태양광시설 부지에서 쏟아진 토사로 수년간 키워온 인삼들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박씨를 따라 들어간 인삼밭에서는 빗물과 토사에 잠긴 인삼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박씨의 시어머니인 김순덕 할머니는 “앞으로 비가 더 오면 토사가 남은 밭에도 흘러내릴지 모른다는 걱정에 밥이 잘 안 넘어간다”며 “인삼밭 위에 산 나무를 깎아 태양광시설을 만든 뒤 올해만 벌써 세번째”라고 말했다. 실제로 박씨가 가리킨 인근 산 중턱에는 태양광시설 부지에서 쏟아진 토사가 눈에 띄었다. 태양광부지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길을 따라 올라가자 흙더미에 파묻혀 무너진 철재 울타리들이 흉물처럼 누워 있었다.
◇되풀이되는 산사태…언제 또 무너질지 노심초사=금산군 남이면 성곡리에 사는 70대 김모 할머니와 이모 할머니의 밭도 태양광시설 부지에서 발생한 산사태로 적지 않은 피해를 당했다. 해당 업체가 토사가 무너진 곳에 임시로 부직포를 설치했지만 연이은 폭우로 이마저 찢어진 상태였다. 이 할머니는 “군청에 항의할 기운도 없어 정식접수는 하지 않고 이장한테만 얘기했다”며 “군청에서 태양광 허가를 내줬으면 사후관리도 신경 쓰는 게 당연한 이치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곳 주민들은 태양광시설이 들어선 뒤 산사태가 일어난 게 처음이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이 할머니는 “2년 전에도 같은 곳에서 토사가 무너져 밭을 덮쳤다”면서 “태양광을 짓기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고 했다. 김 할머니도 “태양광시설을 만들면서 물길이 변했다”며 “태양광 설치 이후 침수피해만 두번째라고 하니 그제야 업체 측에서 물길을 새로 잡아준다고 했다”고 말했다.
태양광발전소 부지를 조성하기 위해 깎아내린 산의 비탈면은 상당히 가팔랐다. 사용 산지의 경사도 허용 기준이 25도에서 15도로 강화되기는 했지만 태양광시설 아래쪽은 깎아내린 듯한 경사를 유지했다. 태양광패널을 건설하는 현장에서는 빗물에 쓸린 토사가 패널 고정용 콘크리트를 덮치며 바닥까지 드러나 있었다. 빗물을 잔뜩 머금은 흙은 손으로도 쉽게 부서졌다.
태양광시설에서 흘러나온 토사로 피해를 본 충북 제천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태양광시설이 들어선 제천시 대랑동의 산자락 아래 놓인 밭은 토사와 함께 휩쓸려온 태양광 구조물과 철조망으로 아수라장이었다. 이곳에 거주하는 김모(65)씨는 “이곳에서 40년을 살았는데 이렇게 산사태로 무너진 것은 처음”이라며 “하마터면 쓸려 내려온 토사가 집까지 덮칠 뻔했다”고 말했다.
아직 일부 남아 있는 태양광시설도 이미 기울었거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위태로운 상태다. 김씨는 2017년 태양광발전소가 들어선 후 올해처럼 폭우가 내릴 때마다 산사태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인근 봉양읍 공전리 태양광발전소도 폭우로 지반이 무너지고 토사가 흘러내리면서 설치물 대부분이 주저앉았다.
“설치허가 내주고 관리는 안해
비오면 밥도 안넘어간다” 울분
남아있는 시설도 위태 노심초사
지자체는 “추가 조사” 소극 태도
◇눈치 보기 급급한 지자체…주민들은 집단소송 불사=이처럼 태양광발전소 인근 주민들이 피해를 호소하고 있음에도 정작 해당 업체나 관할 지방자치단체는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금산군청 관계자는 “태양광부지의 토사가 무너졌지만 설비 피해는 없어 태양광이 아닌 폭우를 주원인으로 보고 있다”며 인과관계를 부인했다. 하지만 실제 인삼밭 피해 사례를 따져 묻자 “태양광시설의 영향이 아예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며 “정확한 판단을 위해 전문가의 추가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고 태도를 바꿨다. 중부산림청에 따르면 금산군 내 산지 태양광시설 중 민가와 근접해 인명피해를 유발할 수 있는 곳은 9곳에 이른다.
유례없이 길어진 장마로 아직 피해복구 작업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제천시 대랑동의 태양광시설 관리인은 “비가 언제 또 쏟아질지 모르는 상황이라 아직 복구하지 못하고 있다”며 “제천시에서도 사업자에 대한 재난지원을 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천시 관계자도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에 대해서는 시에서 재정지원을 하지 않는다”며 “대신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이나 이재민 구호 등으로 지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제천시는 태양광시설 총 469곳 가운데 10일 기준 16곳에 대한 현장점검에 들어갔다.
지자체와 태양광 업체가 서로 책임을 미루면서 일부 주민들은 집단소송도 불사할 태세다. 금산군 선원1리의 김경수 이장은 “올해 태양광으로 인한 침수·토사피해 가구만 10곳 넘게 접수됐다”며 “지난해부터 군청에 민원을 넣었는데 해결되지 않아 업체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자체조사를 통해 태양광시설 인허가 과정의 문제가 발견된다면 지자체나 정부 기관을 상대로 한 소송도 고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도 태양광 난개발에 따른 산사태 가능성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이영재 경북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산 중턱을 깎아 태양광시설을 지으면 지반이 약해지면서 산사태와 인과관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며 “앞으로 집중호우가 잦아지면 산사태가 더 많이 발생할 것 같아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금산·제천=방진혁·한민구·조권형·손구민기자 bread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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