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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8국 연합군 베이징 입성

1900년 中 반식민지화 가속

의화단을 물리치고 베이징에 입성하는 8국 연합군. 중국은 더욱 급속하게 반식민지로 변해갔다./사진=위키피디아




1900년 8월13일, 청나라 베이징이 8국 연합군 수중에 떨어졌다. 약 2만여 병력으로 의화단을 물리치고 베이징을 점령한 연합군은 곧 5만명 넘게 불어났다. 많을 때는 13만명 선에 이르렀다. 눌러앉아 이권을 뜯어내자는 속셈에서다. 연합군에 짓밟힌 중국은 반식민지의 길을 걸었다. 조선에도 영향이 미쳤다. 파병을 계기로 급속도로 가까워진 미국과 일본은 필리핀과 조선을 나눠 먹는 밀약을 맺었다. 연합군의 구성은 일본과 러시아,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병력 순). 열강이 한데 뭉친 것은 의화단의 기세가 컸기 때문이다.

발단은 서구의 오만. 제국주의를 등에 업은 서양 선교사가 중국 관리 위에 군림하고 토지를 빼앗는 행태에 분노한 군중들이 1899년 말부터 의화단 깃발 아래 뭉쳤다. 열강은 ‘청을 도와 서양 오랑캐를 내쫓자(扶淸滅洋)’는 의화단을 말살 대상으로 여겼다. 외국인 선교사와 중국인 기독교인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참하게 살육한 탓이다. 문제는 중국의 내부 사정. 아들 광서제마저 몰아내고 천자 자리에 오른 서태후는 열강을 견제한다며 의화단을 베이징에 끌어들였다. 서태후는 아예 열강에 전쟁까지 선언해버렸다. 베이징 주재 각국 공사들에게 24시간 이내에 무조건 떠나라는 통고와 함께.



외교관들과 가족·선교사 등 925명과 중국인 신자 3,000여명은 자금성 모퉁이에 대피했지만 호위병력은 불과 481명. 십만이 넘는 의화단의 공격과 이들의 저항은 낯설지 않다.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제작됐다는 비판도 받았던 1963년 개봉작 ‘북경의 55일’에 당시 상황이 일부 나온다. 베이징의 백인을 구출한 연합군은 궁전을 부수고 문화재를 약탈했음에도 4억5,000만냥이라는 배상까지 받아냈다. 연 4% 이자를 포함해 총 9억8,224만냥의 상환 부담은 관세와 염세의 차압, 가혹한 세금 부과, 재정난 악화, 근대화 투자 저조, 인플레이션, 경기 침체와 저성장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누적된 모순과 불만은 1911년 신해혁명으로 폭발하고 청나라는 끝내 무너졌다. 열강은 중국 내 이권을 지키려 군벌을 내세워 이간책을 썼다. 중국인들은 37년 가까이 내전과 중일전쟁의 고통을 겪었다.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화단 사건 직후부터 열렬한 친일파로 돌아서 미일 밀월 시대를 이끌었다. 조선은 한때 러시아가 제안한 파병을 검토했으나 일본의 반대로 막혔다. 고종은 망국의 순간까지 순진하게도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 생각했으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고 말았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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