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상파울루 근교에는 알파빌이라는 대단위 민간 고급 주거 단지가 있다. 메갈로폴리스의 높은 범죄율과 어마어마한 교통체증, 도심 곳곳에 방치돼 있는 슬럼가에서 벗어나 자신이 가진 부를 안전하게 누리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상파울루 도심에서 알파빌로 가려면 유료 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진출입 관리도 엄격하다. 주거 단지는 거대한 보안 펜스로 둘러 싸여 있고, 사설 경호원들이 보안과 치안을 담당한다. 펜스 안에는 최고의 기반 시설들이 갖춰져 있다. 학교, 식당, 운동시설, 조경, 내부 도로, 통신, 상·하수도 등이 별도로 운영된다. 브라질 서민들의 눈에 알파빌은 ‘그들만의 세상’이다.
알파빌은 빈부격차가 큰 남미 최대 도시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미국이나 유럽, 중국 등지에도 알파빌과 유사한 구역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부자들의 세상 바깥에서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서 분노하는 다수가 점점 늘고 있다.
하지만 계층 간 균열과 불신, 불만이 계속 커져 가는 와중에 정치인과 엘리트 집단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내부의 불만을 다스리지 못하다 보니 걸핏하면 국경 밖에서 적을 찾으려 한다. 툭하면 이민과 무역 문제를 걸고넘어지는 선동적 정치인들이 속출한다. 반면 미래 대비는 태부족이다. 기후변화나 4차 산업혁명, 사이버 갈등 등이 가져올 엄청난 파장에 대한 대책 논의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가 차원에서든, 국제사회 차원에서든 오래도록 정답이라 믿었던 국내외 질서 유지 시스템이 붕괴 직전이지만 세상에는 선동가들만 넘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996년 동료 저널리스트 하랄트 슈만과 함께 쓴 ‘세계화의 덫(The global trap)’으로 세상에 경고음을 냈던 한스 페터 마르틴이 20여 년 만에 신작을 냈다. 당시 ‘20대 80 사회’라는 표현으로 세계화의 어두운 이면, 즉 구조화된 불평등문제를 파헤쳤던 그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 세상이 더 악화했다고 단언한다. 신간 제목도 더 살벌해졌다. ‘게임 오버(Game over)’다.
책은 현재 당면한 문제에 대한 정리 분석과 미래에 대한 제언으로 구성돼 있다. 주로 유럽과 미국 등 서구의 사례를 들지만 한국 상황이 자연스레 오버랩 된다. 고용 불안정과 높은 실업률 문제, 환경을 돌아보지 않는 성장 지상주의, 신뢰를 잃어버린 언론 미디어, 배후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로비스트, 신민족주의에 표를 던지는 저소득층, 모국에서 살아가지만 스스로 이방인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의 분노 등은 결국 세계 공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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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주거 문제에 대한 유럽인들의 분노를 설명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책에 따르면 2011년 독일의 주거비는 평균 소득의 28%를 차지했으나 2015년에는 35%로 늘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성실한 젊은 부부라면 큰 예외 없이 소박한 단독주택 한 채 정도를 가질 수 있었지만 이제는 부유한 부모가 있거나 돈을 아주 많이 벌어야만 집을 가질 수 있다. 주거 불안정성이 커지면서 저소득층의 고통은 커졌지만 직업 투기꾼들은 배를 불렸다. 국내 부동산 문제의 대안을 찾기 위해 독일 사례를 검토하기도 하지만 부동산 문제는 결국 어느 나라에서건 금리, 투기 자본, 인구 구조 및 일자리 변화 등이 오래도록 맞물려 만들어낸 부작용임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민주주의도, 신자유주의도 이제 효용을 다했다고 말한다. 극단적 불평등, 어디서나 감지되는 불안, 엘리트들의 반란, 무역분쟁, 기후변화, 인구변화, 로봇기술, 디지털화, 전제적 권력자들의 전쟁 욕망 그리고 점점 고도화하는 개인 감시 기술까지 위기의 분화구들이 동시 다발로 연기를 내뿜고 있는 중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우리가 지금 변화 앞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이미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만큼 서둘러 ‘새로운 게임’을 준비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이를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20가지 아이디어는 간략하지만 한국 입장에서도 충분히 고려해볼 가치가 있다. 먼저 대화의 필요성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균열을 막기 위해 우파와 좌파, 부자와 빈자, 노조와 신자유주의자, 청년과 노인이 함께 모이는 자리를 정기적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또한 교육을 강조한다. 단순히 취업을 위한 교육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전반적인 교육 수준을 높여 사회적 균형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발상 전환의 필요성도 강조한다. 디지털 변화와 맞물려 시간적·공간적 노동 유연성을 요구받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인간적인 삶을 안정시킬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기계세 부과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서구식 세계화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중국의 감시자본주의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발한다. 저자는 “경제적으로 피해를 입더라도 보편적 인권과 정보보호권을 옹호해야 한다”며 “미국 정부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멍청이처럼 중국 권력자들의 손에 놀아나서는 안되다”고 말한다. 2만5,000원.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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