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하는 캐릭터마다 매번 초면인 것 같은 배우 박정민. 여장 한 번 했을 뿐인데 충무로를 완전히 뒤집어놓으셨다.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씬스틸러’란 무언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준 ‘비밀병기’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다시금 자신의 진가를 드러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20일까지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392만 4,573명을 동원하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험을 뚫고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 올 여름 최고의 흥행작 타이틀도 거머쥐었다.
작품은 ‘신세계’ 이후 7년 만에 재회한 황정민, 이정재 조합으로 주목받았지만, 뚜껑을 열자 반전의 키를 쥔 박정민에게도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박정민 자체가 스포일러’라는 이야기까지 나오며 개봉 전까지 꽁꽁 베일에 싸여 히든 카드였던 ‘유이’는 황정민이 맡은 ‘인남’의 마지막 미션을 돕는 조력자라는것 외에는 정보가 공개되지 않았다. 영화 홍보 기간에도 정체를 숨겨 관객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액션과 느와르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이 작품에서 유이는 액션에 관심도 없거니와 갈등구조에서 제외된 인물이다. 모호한 성 정체성으로 영화에 녹아든 박정민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캐릭터에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미친 존재감’을 뽐냈다. 숨이 막힐 듯 팽팽하던 극의 분위기는 그가 등장할 때마다 거짓말처럼 환기됐다. 아마도 극장을 나선 후 포털사이트에 박정민을 검색하고 그의 필모그래피를 훑어본 관객이 꽤 됐으리라.
성 정체성이 모호한 캐릭터를 표현하기란 베테랑 배우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박정민은 사전 준비 기간에 다큐멘터리와 관련 영상들을 참고하며 캐릭터를 구축했다. 샐쭉한 표정, 카랑카랑한 목소리, 치켜뜬 눈빛, 낭창한 걸음걸이, 콕 집는 손 끝, 뾰족거리는 입술 등 여성 특유의 몸짓이나 행동, 말투를 그만의 스타일로 표현해냈다. ‘뭐야 이 오빠 눈빛 X 같애’, ‘어우 X발 더워’ 등 거침없는 구강액션을 선보이지만, 그런 모습이 밉지 않고 영화를 보는 내내 그를 기다리게 만든다. 캐릭터를 완벽하게 표현했기에 희화화 될 수 있는 유이가 소모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수 있었다.
박정민은 대중에 꾸준히 호감의 이미지를 쌓아왔다. 미남 배우들만큼 외모가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좋은 인상을 만들었다. 어떤 캐릭터를 만나도 그대로 흡수해 자신만의 색으로 해석해 자연스러운 인물을 만들어냈다. 홍원찬 감독은 “박정민이 스크린에 나오면 일단 관객이 굉장히 좋아하더라”며 “박정민에 대해 가지는 호감도가 높다. 유이라는 낯선 캐릭터가 박정민이 연기한다면 좀 더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며 만족감을 전했다.
이정재 역시 서울경제스타와의 인터뷰에서 “박정민이 이번 영화에서 가장 큰 공로자가 아닌가 싶다. 나와 황정민은 액션을 보여줘서 볼거리가 있었지만, 유이를 맡은 박정민은 오로지 연기만으로 소화를 해낸거니까…. 우리 영화가 덕분에 풍요로워졌다”고 극찬했다.
2011년 영화 ‘파수꾼’으로 데뷔한 박정민은 단번에 충무로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이후 ‘동주’에서 묵직한 연기로 깊은 여운을 선사했고, ‘변산’, ‘그것만이 내 세상’, ‘사바하’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며 치열한 준비와 노력으로 자신만의 스펙트럼을 구축해왔다.
연기 천재로 불리는 그지만 사실 엄청난 노력파이기도 하다. 영화 ‘변산’에서는 래퍼 역할로 직접 랩을 선보였고,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서번트증후군의 천재 피아니스트 역할을 위해 6개월간 5시간씩 피아노 연습에 매진해 대역 없이 연주 장면을 소화했다. ‘타짜3’에서는 역할을 위해 20㎏를 감량하기도 했다. ‘노력하는 천재’라는 별명은 정말 노력에서부터 만들어졌다.
성실함과 노력으로 자신만의 것들을 꾸준히 펼쳐온 결과는 정직하게 나타나고 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이후에도 출연할 작품들이 즐비하다. 연상호 감독이 연출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 출연을 확정했고, 신연식 감독의 신작 ‘1승’에서는 송강호와 호흡을 맞출 예정이다. 숨겨놨던 매력을 어떻게 드러낼지 항상 궁금해지는, 늘 도전하고 배우는 앞으로의 박정민이 더 기대된다.
/이혜리기자 hyer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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