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8년 8월 31일,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는 ‘아일랜드인 연합’이 ‘코노트 공화국(Republic of Connacht)’을 세웠다. 목표는 종교의 자유와 완전한 독립. 13세기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으며 끝없이 저항해 온 아일랜드인들은 천금의 기회로 여겼다. 사기도 높았다. 프랑스군 1,100명의 지원을 받은 독립군 900여 명이 영국군 6,000여 명을 격퇴한 캐슬 전투 직후인데다 프랑스 지원병력도 증원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녹록하지 않았다. 수반으로 위임된 존 무어(36세)와 프랑스군 사령관 움베르 준장(31)은 8개 보병연대와 4개 기병연대 등 2만 병력 확보에 나섰지만 시간이 모자랐다.
공화국 선포 직후인 9월 8일 벌어진 발리나뮈 전투에서 10배가 넘는 영국군에게 일방적으로 패한 이후 코노트 공화국은 동력을 잃었다. 프랑스군이 항복한 뒤에도 끈질지게 저항했으나 대세를 돌리지 못했다. 수반인 존 무어도 체포돼 압송 과정에서 생을 마쳤다. 마침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으로 위기감에 젖었던 영국은 아예 합쳐버리는 초강수를 뒀다. 자치권을 누려온 귀족들이 반발하자 윌리엄 피트가 이끄는 영국 정부는 금전과 작위를 마구 뿌렸다.
결국 1800년 합동법이 통과돼 아일랜드는 영국의 지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깃발이 합쳐진 브리튼 왕국의 깃발에 아일랜드 성 패트릭기가 더해져 오늘날의 유니온 잭이 완성된 것도 이때다. 대영제국의 깃발 아래 아일랜드는 평온했을까. 약속대로 종교의 자유는 보장됐을까. 정반대다. 아일랜드 가톨릭은 탄압받고 대지주 우대정책으로 소작농들은 터전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감자 잎마름병에서 촉발된 감자 대기근은 아일랜드의 800만 인구를 절반으로 줄여 놓았다.
굶어 죽거나 살기 위해 고향을 등져야 했던 아일랜드는 자치와 반쪽짜리 독립 이후에도 숱한 피를 뿌렸다. 현실에 대한 저항과 환멸의 편차가 컸기 때문일까. 아일랜드는 현대문학에서 금자탑을 세웠다. 존 예이츠 등 노벨 문학상 수상자(4명) 외에도 제임스 조이스, 오스카 와일드, 유진 오닐 등 숱한 거장들이 나왔다. 오늘날 아일랜드가 영국을 압도하는 소득을 올리는데에도 이런 문화적 배경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배가 부르니 아일랜드인들의 생각도 바뀌었을까. 그렇지 않다. 누가 아일랜드인이 한국과 비슷한 성정을 가졌다고 말했나. 한(恨)이 많고 정(情)이 깊다지만 우리랑 많이 다르다. 시골 선술집에도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역사는 내일을 위한 자양분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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