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9월 10일 정오, 스위스 제네바 레만 호숫가. 배에 오르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60세)가 칼에 찔렸다. 범인은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 루체니(25세). 여느 때처럼 신분을 감추고 여행하던 황후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2시 30분께 숨을 거뒀다. 장례식에는 각국의 왕실과 귀족가문은 물론 일반 조문객들까지 줄을 이었다. 오스트리아에 반감이 컸던 헝가리마저 슬픔에 잠겼다. 암살된 황후의 이름은 엘리자베트 폰 외스터라이히웅가른. 본명보다는 결혼하기 전의 애칭인 ‘시시(Sisi)’로 더 기억된다.
생전에도 시시로 불릴 때가 많았다. 그만큼 인가가 높았다. 대중의 이목을 끈 이유는 두 가지. 미모와 소탈한 성격 때문이다. 당대 유럽 왕실을 통틀어 최고 미인으로 꼽혔던 시시는 허리가 가늘기(19~20인치)로도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황태자비 간택부터 화제를 몰고 다녔다. 두 살 위 언니가 원래 신부감이었지만 가족 대면식에서 시시에게 한 눈에 반한 황태자는 고집을 부렸다. 일곱 살 위의 황태자와 결혼한 시시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부 갈등 탓이다.
시어머니이자 이모였던 조피 태후는 시시처럼 다정다감했었으나 왕자비 시절 각별한 교감을 나눴던 나폴레옹 2세가 요절한 뒤부터 성격이 급변했다고 알려진 인물. 자녀 양육에 광적으로 매달린 조피는 시시에게 엄격한 궁정 예절을 강요하고 손자 손녀들의 양육권을 빼앗았다. 조피가 그토록 집착했던 아이들은 근대사에 큰 흔적을 남겼다. 첫째는 오스트리아 황제에 오르고 둘째 아들 페르디난트는 멕시코 황제 맥시밀리안 2세로 등극했으나 혁명군에 총살되고 말았다.
셋째 아들의 장남은 황태자에 지명됐으나 1914년 사라예보에서 저격받았다. 이는 1차 세계대전으로 번졌다. 시시의 장남 루돌프는 조피의 손에 양육돼 황태자가 됐지만 이루지 못할 사랑을 비관해 자살로 생을 마쳤다. 시시는 루톨프 사후 평생 상복을 입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바깥에서 떠돌던 시시는 뜻밖의 성과도 거뒀다. 부다페스트를 방문한 시시의 보헤미안적 성격과 미모에 헝가리인들은 열광적으로 환호하고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성립에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시시는 달러 박스다. 합스부르크가문이 남긴 쇤부른 궁전을 비롯한 박물관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가장 많이 팔리는 기념물이 시시 관련 상품이다. 초콜릿과 머그잔, 키 홀더, 달력, 냉장고 자석에서 보석함, 오르골까지 온통 시시 일색이다. 박물관에서 유럽의 역사를 공부하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시시에게 털렸다는 말까지 있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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