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는 종교인지 논란이 있지만 전통과 삶의 제도로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단체와 연구자에게 유교의 가치는 살아 숨 쉬고 있을까. 불교는 아직도 살아 있는 종교이고 전국적으로 수도하고 기도하는 수많은 도량과 불자를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관련 단체와 신자들에게 불교의 가치가 살아 숨 쉬고 있을까. 기독교의 신구교는 현재 가장 많은 신도를 보유하고 종교적 영성을 일깨우고 있다. 하지만 그 단체와 신자들에게 신구교의 말씀이 살아 숨 쉬고 있을까.
이 질문은 보통 사람이 대답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공자나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지금 여기를 찾아온다면 이 땅이 진정한 유교의 나라나 부처님의 나라나 하나님의 나라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 이 질문에는 보통 사람도 그렇게 대답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유교나 불교나 기독교를 믿는 사람과 그 모임이 사랑과 자비에 충만하고 사람의 선성과 영성을 일깨우는 데 진력한다고 단호하게 말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 정치는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제기되는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해야 한다.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과 단체가 과연 갈등을 줄어들게 할까 아니면 갈등을 더 늘어나게 할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많은 사람은 정치인이 연예인만큼이나 하루에 기존의 갈등을 더 부풀리고 새로운 갈등을 일으키는 악역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갈등은 대부분 말로 시작된다. 처음에 언어는 신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신성성을 가졌다. 제사장은 이 목소리를 전달하며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위를 가졌다. 이후 언어는 세계의 진리를 탐구하는 고귀한 태생으로 간주됐다. 소수의 선각자만이 진리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나머지는 선각자로부터 귀를 쫑긋 세워 배웠다. 다음에 언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를 전달하고 소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이제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로 편하게 표현했다.
오늘날 언어도 여전히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기능이 훨씬 더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누가 보고 들어도 상식에 맞지 않은데 일군의 사람과 주장을 공유하면서 사회를 대상으로 끊임없이 궤변을 송신한다. 대화는 불가능하고 늘 같은 말을 장소만 바꿔가며 되풀이한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꼭 상대를 흥분시키는 자극적인 말을 골라 표현하고 그로 인해 하루 저녁 뉴스의 주인공이 된다. 어떻게 그러한 언어 조합이 가능한지 신기할 정도로 뛰어난 화술과 조어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의미는 잘 전달되지 않지만 말하려는 의도는 알 수 있는 배설의 언어가 넘쳐난다. 이 언어는 한갓 기호일 뿐 어떠한 의미를 실어 나르지 않는다.
이러한 궤변과 자극, 그리고 배설의 언어가 한 번 발화되면 다른 모든 이야기를 숨죽이게 하고 언론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그리고 유튜브를 넘나들며 사람들의 관심을 태풍보다 더 강력하게 끌어들인다. 궤변과 자극, 그리고 배설의 언어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차분히 따져보지 못하게 할 정도로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고 맹렬한 속도로 진영을 가른다. 진위는 없고 찬반만 있다. 이는 모두에게 불행이고 비극이다.
이와 관련해 ‘대학’의 글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 집안이 사랑을 펼치면 온 나라 사람이 서로 사랑하게 된다. 한 사람이 이익을 탐하면 온 나라 사람이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런 현상을 두고 한마디 말이 일을 그르치고 한 사람이 나라를 안정시킨다고 한다(일가인一家仁, 일국흥인一國興仁. 일인탐려一人貪戾, 일국작란一國作亂. 차위일언분사此謂一言분事, 일인정국一人定國).”
이야기에 다소 비약이 있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궤변과 자극, 그리고 배설의 언어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갑자기 확산시키고 사회 갈등을 진지하고 차분하게 모색하는 공론의 장을 걷지 못하게 만든다면 ‘일언분사’가 적실한 진단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이 되지 않으면 아예 듣지를 말자. 광야에 외쳤을 때 메아리가 없다면 궤변과 자극, 그리고 배설의 일언분사가 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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