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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세키가하라 전투

1600년, 도쿠가와 시대 열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일본의 패권을 놓고 16만명이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를 묘사한 그림. /위키피디아




1600년 9월15일 아침 7시30분 세키가하라. 일본의 패권을 놓고 동군 7만5,000명과 서군 8만4,000명이 맞붙었다. 당초 예상은 서군의 우세. 병력도 다소 많았고 유리한 지형을 먼저 차지했으니까. 주변 언덕 세 곳을 점령한 서군은 동서 4㎞, 남북 5㎞인 세키가하라 평원에 포진한 동군을 에워쌌다. 선공은 동군이 날렸다. 짙은 안개를 타고 침투한 300여 보병이 서군 코앞에서 조총 탄알을 내뿜었다.

황급한 대응사격 속에 양측의 후속 병력이 뒤엉켰다. 안개가 걷히며 서군이 차츰 우세를 보였으나 난전은 정오까지 이어졌다. 동군의 총대장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갈수록 밀리는 전황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서군 포위망의 배후에서 배반이 일어난 것. 마지못해 서군에 가담했으나 형세를 관망하던 다이묘(영주)들도 배반에 합세하며 전세는 동군 측으로 기울었다.

서군을 불러모았던 이시다 미쓰나리가 애타게 기다린 구원군은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서군의 총대장으로 추대된 모리 데루모토는 병사들에게 도시락을 먹여야 한다며 성에 웅크려 지켜봤을 뿐이다. 결국 군세와 지형에서 유리했던 서군은 배반과 방관으로 참패하고 말았다. 동군은 병력의 5%를 잃은 반면 서군은 절반이 죽거나 다쳤다. 임진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섯 살인 아들 히데요리를 남기고 죽은 지 2년 만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는 일본의 역사를 바꿨다.



겉으로는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충성 경쟁이었으나 실은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충성파(서군)와 신흥 권력자(도쿠가와) 사이의 대결이었던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패는 정보전과 포용력·경제력이 갈랐다. 도쿠가와는 히데요시의 가신들마저 포섭한 반면 충신을 자처한 이시다는 맹목적 충성심과 자만에 빠져 서군의 결속력을 스스로 깨트렸다. 동군의 병력은 다소 적었으나 석고(쌀 생산량)에서는 서군을 근소하게 앞섰다.

천하의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는 동군의 경제력부터 무너뜨렸다. 이시다와 고니시 유키나가 등 핵심을 참수하고 서군 다이묘들의 영지를 삭감해 공신들에게 나눠줬다. 다이묘에게 등급을 매겨 에도(도쿄) 가까운 땅부터 측근들을 앉혔다. 도쿠가와는 전투 승리 2년 뒤 쇼군에 임명돼 실질적 정부인 바쿠후를 열고 그 후손들은 개항과 유신 전까지 일본을 다스렸다. 세키가하라의 한과 논공행상의 불만을 잊지 못해서일까. 서군 쪽에 섰던 조슈와 사쓰마 번은 260여년을 절치부심한 끝에 유신의 기치를 들고 도쿠가와 정권을 무너뜨렸다. 영원한 권력은 없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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