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는 철학계의 심술궂은 투덜이다. 염세주의자에 독설가, 비관론자, 허무주의자, 염결주의자인 이 노철학자는 이마에 깊게 팬 주름만큼 제멋대로 흘러가는 세상과 인생에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사랑이나 행복, 꿈, 희망 같은 환상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아픔을 생의 ‘디폴트’ 상태로 여기는 이 철학자는 아프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가끔 인생이 욕심만큼 안 풀려 초조하고 갑갑할 때면, 나는 사랑과 희망이 넘실거리는 책을 덮고 이 완고하고 냉소적인 할아버지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네가 지금 기다리고 기대하는 것은 ‘한낱 망상의 산물’이라며 찬물을 끼얹는 쇼펜하우어의 일갈을 듣고 있으면, 등허리를 꼿꼿이 세우게 된다. 장밋빛 커튼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던 전반생에서 인생 후반부로 넘어가는 일은 괴롭지만, 결국 우리는 환상보단 아픔을 가까이 두고 살아가게 된다. 인생 후반전은 그렇게 환상이 산산조각난 다음, 그 유리파편을 밟고 지난 자리에서 다시 시작된다. /문학동네 편집팀장 이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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