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 요시히데 정권이 본격 출범하면서 일본 조야와 국제사회에서는 일본 정치의 오랜 부조리인 파벌정치와 고질적 관료주의가 깨질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오랜 아베 신조 정권 속에서 파벌정치와 관료주의의 폐단이 자주 지적됐던 만큼 이를 혁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지만 이를 일본 정치의 한 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스가 시대를 맞아 파벌정치와 관료주의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크지만 스가 총리가 자민당 내 여러 파벌의 지지를 바탕으로 총리에 오른 점을 감안하면 파벌정치 혁파에 실제로 나서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17일 아사히·요미우리 등 일본 언론과 국내외 전문가들에 따르면 스가 총리는 규제 개혁과 함께 좋지 않은 일본의 정치·행정 관례를 깨겠다고 했지만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스가 총리가 자민당 내 여러 파벌의 합의로 총리에 오른 사람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스가 총리의 한계를 이해하려면 먼저 일본 정치의 특징을 알아야 한다. 한국 정치에 있는 ‘무슨 파’나 ‘친(親) 누구’ 식의 암묵적 모임과 달리 일본의 파벌은 정치인 각자가 특정 파벌임을 선언하고 집단행동을 한다. 공식적인 세력이다. 당 총재선거에서는 파벌별로 표를 몰아주고 나중에 논공행상을 요구하는 게 기본이다.
이 때문인지 이번 스가 정권에서는 벌써부터 ‘2인자’ 또는 ‘다음 타자’ 얘기가 나온다. 고노 다로 행정개혁상이 차기를 예약한 사람이 아니냐는 것이다. 고노 행정개혁상은 전날 시작해 이날 새벽까지 이어진 총리와 각료 기자회견에 대해 “이런 것이 전례주의이자 기득권 권위주의다. 빨리 없애고 싶다”고 말했다. “행정의 수직, 기득권, 나쁜 전례주의를 깨부숴 규제 개혁을 전력으로 추진하겠다”는 스가의 메시지를 더욱 강한 어조로 얘기한 것이다. 고노 행정개혁상의 이번 발언이 스가 내각에서의 그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는 분석도 일본 정가에서 나온다.
실제 고노 행정개혁상은 전날 열린 첫 각의에서 총리 임시대리 1순위인 아소 다로 부총리보다 상석을 차지했다. 중·참의원 본회의장 각료석은 의장석에서 볼 때 중앙의 연단 기준으로 왼쪽이 총리 자리이며, 연단을 끼고 오른쪽이 이른바 넘버2 좌석인데 이 자리에 고노가 앉은 것이다. 스가 총리의 규제 개혁을 수행해야 할 고노의 역할을 부각하기 위해 이런 결정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스가 총리가 관료주의 타파를 주요 정책과제로 내걸었지만 아베 정권의 폐해 중 하나로 꼽혔던 관료의 정권 눈치 보기(손타쿠)가 줄어들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목소리가 여전하다. 아사히신문은 사설을 통해 스가 총리가 관료의 수직적 관계, 기득권 철폐 등을 강조했지만 이는 수단에 불과하며 이를 통해 무엇을 실현하려고 하는지 구체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실제 스가 총리는 총리 취임 전 한 방송에 출연해 정부 결정과 방향성에 반대하는 관료들은 자리를 떠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 주요 부처의 중견 간부는 마이니치신문에 “아베 정권에서 손타쿠가 문제였지만 새 정권에서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며 “스가 총리는 아베 이상으로 관료들을 찍어 누르려는 경향이 있어 관료들이 더 위축될 수 있다”고 말했다.
스가 총리가 반대 의견을 듣기 싫어하는 스타일이라고 해도 당분간 자신의 색깔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을 자제할 가능성이 크다. 다른 나라의 정상들이 취임 직후 ‘힘’과 ‘세력’을 바탕으로 평소 구상을 실현시켜나가는 것과 정반대로 ‘아베 계승자’로서 조용한 행보를 보일 수 있다. 변수는 조기 총선이다. 스가 총리가 과연 자신의 운명을 걸고 중의원 해산과 총선거 카드를 꺼내느냐가 관건이다. 스가 총리의 임기는 내년 9월까지인데 임기 내 중의원을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한 다음 자민당 총재에 다시 도전하면 ‘1년짜리 총리’를 벗어나 장기 집권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정가에서는 휴대폰 요금 인하 등 정책 성과를 보여준 뒤 내년 3~4월께 중의원을 해산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 시기를 놓치면 공명당이 중시하는 도쿄도 의회 선거(7월)에 이어 도쿄올림픽(7월23일~8월8일), 패럴림픽(8월24일~9월5일)이 있기 때문에 중의원 해산 시점을 잡기가 쉽지 않다./박성규·맹준호기자 exculpate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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