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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언어정담] 당신의 슬픔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작가>

내 안의 불안과 슬픔이 커져갈수록

타인에 의해 '자기혐오'로 쉽게 내몰려

어두운 내면 인정하고 깊이 파고들어야

비로소 '더 큰 나'를 발견할 수 있어

정여울 작가




심리학을 공부하기 전, 나는 악몽과 가위눌림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잠을 자고 나면 피로가 풀리기보다는 악몽과 가위눌림에 한껏 시달린 느낌이었다. 다시 악몽에 사로잡힐까봐 잠드는 것이 두려울 때도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넌 문제가 없는 아이 같다’고 하는데, 내 마음속에는 지독한 우울과 두려움이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안개처럼 드리워 있었다.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너는 이 세상의 짐을 혼자 다 짊어진 것처럼 보인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난 원래 그런 사람인가보다’하고 체념하기도 했다. 사실 나도 내가 왜 그런지 몰랐다. 유아기의 무시무시한 상처가 있는 것도 아닌데 늘 불안하고 두려웠다. 우울이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감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울이라는 감정의 갑옷이 나에게는 가장 편한 의상이었다. 항상 환하게 웃는 사람들을 보면 판타지 영화를 보는 듯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애써 쾌활한 척하며 내 불안을 가려보기도 했지만, 우울이라는 보이지 않는 베일이 내 온몸을 꽁꽁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심리학을 독학한 이유 중 하나는 타인의 평가(‘당신은 이곳이 문제군요’, ‘당신은 여기가 아프군요’라는 식의 진단)에 휘둘리지 않고 내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알고 싶기 때문이었다. 불안과 우울은 안개처럼 뿌옇게 내 마음을 가리고 있었고, 나는 내 마음의 실체를 정확히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런데 심리학은 ‘치유의 기쁨’ 이전에 ‘앎의 즐거움’을 일깨웠다. 역사나 철학이나 문학만큼 심리학은 지적 호기심을 강렬하게 불러일으켰다. 트라우마, 방어기제, 자기효능감, 의미치료 등 심리학의 개념을 하나하나 알아낼 때마다 벅찬 앎의 기쁨이 밀려왔다. 심리학 공부는 내 가슴 속에서 매일 열리는 셀프 아카데미의 축제였다. 새로운 개념과 에피소드를 알아낼 때마다 ‘나는 비정상이구나’라는 자기혐오적 사고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심리학 공부를 통해 깨달았다. 내가 느끼는 불안과 우울은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이고,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매일 아픔을 경험하면서도 용감하게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심리학의 개념을 알아낼 때마다 가슴 속에 환한 전구가 켜지듯 기뻤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대면’이었다. 내 불안과 두려움, 슬픔과 어둠의 실체를 완전히 맨얼굴로 맞닥뜨리는 것. 그것은 어렵지만 반드시 거쳐야 할 내면의 분석 작업이었다. 그러면서 내 안의 불안과 우울이 ‘가족을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과 ‘언제 어디서나 탁월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비롯됨을 알게 되었다. 초등학생 시절 왕따를 당한 경험이 내 평생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도, 미처 이루지 못한 과거 우정과 사랑의 기억들이 현재의 인간관계를 망치고 있다는 것도 또렷이 알게 되었다. 트라우마와의 만남은 분명 뼈아픈 체험이지만 통쾌한 해방이기도 했다. 대면은 아프지만 반드시 거쳐야 할 내면의 통과의례로, 슬픔의 기원이 어디인가를 명확히 해줬다.



대면은 단지 그림자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트라우마와 콤플렉스가 모여 있는 어두운 그림자의 지층을 뚫고 들어가면, 내 안의 더 깊고 커다란 전체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수없이 버림받은 기억들, 사랑받지 못했던 기억들을 돌아보며, 나는 그 끔찍한 상처의 반복 속에서도 결코 잃지 않은 내 안의 더 큰 내적 자산과 만나게 됐다. 내가 인간관계에서 거듭 상처를 받으면서도 결코 그 관계를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한 번이라도 아꼈던 사람은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그 사람이 아무리 큰 잘못을 했을지라도, 어디선가 그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하는 따스한 마음이 내게 더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됐다. 나는 ‘대면’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무수히 상처받았지만 결코 ‘타인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전사임을. 아무리 강력한 트라우마도 결코 내 깊은 ‘사랑에 대한 사랑’을 멈출 만한 위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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