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0년 9월23일 뉴욕주 태리타운. 영국군 정보장교 존 앙드레(당시 29세·그림) 소령이 민병대의 불심검문에 걸렸다. 앙드레 소령은 민병들을 왕당파로 여기고 “안전지역까지 함께 가자”고 말했다. 실은 영국군의 독일 용병인 헤센카젤군의 외투를 걸친 대륙군 민병대였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앙드레는 위조된 신분증을 보였으나 장화 속에 숨긴 비밀문서로 정체가 드러났다. 대륙군은 비밀문서에 경악했다. 베네딕트 아널드(40세) 소장이 영국에 웨스트포인트 지역을 넘기려 한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아널드는 대륙군을 위기에서 구한 명장. 1775년 가을 아널드 준장은 기발한 작전으로 4주 동안 영국군의 진격을 막았다. 새러토가 1차 전투(1777년)에서는 지휘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두 차례 돌격을 감행, 승전을 이끌었다. 영국군 사령관 존 버고인 장군이 항복한 새러토가 전투는 참전을 저울질하던 프랑스가 지원병을 파견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미국의 대중역사가 케네스 데이비스에 따르면 ‘아널드의 승리가 아니었다면, 프랑스의 참전도 없었고 전쟁은 바로 종결됐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전투에서 두 번이나 총에 맞은 그의 왼쪽 다리는 5㎝ 짧아졌다. 아내는 병상에서 외롭게 죽었다. 국가를 위해 헌신했는데도 훈장과 승진은커녕 구설에 시달렸다. 강압적 지휘와 공금 유용, 월권에 대한 진정도 많았다. 대부분 사실이 아니었고 심지어 개인 빚을 얻어 부대를 운영한 적도 있지만 소장 진급도 가장 늦고 한직을 돌았다. 대신 빚만 늘었다. 37세 때 재혼한 19세 연하 신부의 씀씀이가 컸던 탓이다. 왕당파 가문 출신인 신부의 종용으로 영국과 내통하려던 계획이 들통 나자 아널드는 영국군 진영으로 달아났다.
배신의 대가는 일시 보상금 6,315달러와 평생 연금 360파운드. 영국 육군 준장 계급장을 달고 뉴욕 전선에 투입됐지만 그는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군복을 벗었다. 사업도 신통치 않아 60세에 캐나다에서 죽은 그의 이름은 아직도 배신의 대명사로 통한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유다는 한 사람(예수)만 판 반면 아널드는 300만명을 팔아먹었다’는 말을 남겼다. 미국인들은 해외로 이전하는 기업을 ‘베네딕트 아널드 기업’이라고 부른다. 주목할 대목은 아널드 같은 반역자는 더 없었다는 점. 아널드에서 한국이 보인다. 그가 300만명을 배신했다면 이완용 등은 1,800만명을 팔아먹었다. 미국은 아널드를 응징하고 기억하는 반면 한국에서 매국노 후손들은 여전히 떵떵거린다. 과거는 이제 잊어버리자며.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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