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유통산업발전법이 10년을 맞았다. 지난 1996년 이마트 창동점을 시작으로 국내 대형마트 시장이 열리고 1990년대 후반 까르푸·월마트·테스코 등에 유통시장이 개방되면서 국내에서 대형마트는 고속성장했다. 대형마트의 급속한 성장으로 기존 전통시장이나 중소상인들이 위협받는다는 이유로 2010년 생겨난 규제가 유통산업발전법이다. 우선 신규 출점을 제약했다. 전통시장 반경 1㎞ 이내가 전통상업보존구역이 되면서 이 구역 내에 3,000㎡ 이상의 면적을 가진 백화점, 대형마트, 쇼핑센터, 기업형 슈퍼마켓 등의 새 점포를 여는 것이 금지됐다. 2년 뒤에는 대형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에 월 2일 의무휴업, 심야영업 금지 규정이 추가됐다. 취지는 골목상권·재래시장·중소상공인 보호였다.
그 사이 유통환경은 급변했다. e커머스의 비중이 30%에 육박했으며 오프라인 매장은 줄줄이 폐점되고 있다. 소상공인의 설 자리를 더 잃게 하고 소비자 선택의 폭마저 좁히는 ‘식자재마트’라는 괴물을 양산했다. 더 나아가 이제는 복합쇼핑몰까지 규제해 소비자들의 몰링(복합쇼핑몰에서 여가생활을 즐기는 것) 권리도 침해하겠다는 조짐까지 보인다.
최근 가장 큰 환경 변인은 예상치 못했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다. 한국의 유통 산업은 어디에 와 있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 성장의 해법은 무엇인지 내년 1월 임기를 시작하는 정연승 차기 유통학회장(단국대 경영학부 교수)에게 들어본다. 올해 28대 한국마케팅관리학회장에도 새로 선임된 정 회장을 최근 판교의 기업혁신센터에서 만났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유통업체의 ‘황금의 엘도라도’는 복합쇼핑몰
“주말이나 퇴근 후에 어디로 가시나요? 저는 요즘 유일한 낙이 현대백화점 판교점에 가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는 거예요. 방역도 잘돼 있고 먹거리도 풍부하며 영화관과 교보문고, 소소한 테마파크는 물론 어린이도서관까지 갖춰져 있어 웬만한 것은 다 해결되니까요.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갈 데가 없으니까 여기 많이 온다고 들었죠. 경험할 곳이 많은 ‘백캉스(백화점+바캉스)’ ‘몰캉스(쇼핑몰+바캉스)’를 떠나는 이들이 늘어나는 중입니다.”
정 회장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오프라인 매장이 ‘황금의 엘도라도’가 될 것이라고 입을 뗐다. 복합쇼핑몰을 중심으로 온라인과 연계된 체험 위주의 오프라인 매장이 ‘황금의 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19 때문에 비대면 재택근무가 확산되고 있고 앞으로도 빠른 정착이 예상된다. 결국 사람들의 시간은 많아지고 더 심심하고 외로워질 것이라는 얘기다. 정 회장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리는 곳은 다름 아닌 쇼핑부터 레저·유희·먹거리·휴식 등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복합쇼핑몰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정 회장은 “유통업체들은 비용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여 일단 살아남아 ‘포스트 코로나 반전 드라마’를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욱이 해외여행을 못 가는 사람들이 대체재로 찾는 것이 복합쇼핑몰과 명품 쇼핑이라고 한다. 전자는 가족 단위로 즐길 수 있어 매우 현실적인 대안으로 꼽힌다. 후자는 해외여행을 떠날 때 즐거움 중의 하나였던 면세점 명품 쇼핑으로 마음을 달래자는 ‘보복소비’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정 회장은 “혼자 하는 일방적 개념의 온라인쇼핑에서 빠져나와 쌍방향의 쇼핑, 몰링 자체만으로 힐링이 되는 쇼핑을 찾는 소비자들이 본격적으로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e커머스의 공세로 가장 위협받고 있는 대형마트는 어차피 급변이 예고된 미래를 조금 더 앞당겼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조언했다. 다만 이번 기회에 비용 절감과 동시에 판매·체험공간을 기본으로 풀필먼트·자동화·비대면 서비스 등을 모두 갖춘 효율적인 스마트매장으로 속도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키오스크, 서빙로봇, 무인 서비스 등 스피드와 효율성·첨단기술을 경험하면 오프라인 매장으로 발길이 갈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유통이 도시를 바꾼다…오프라인 유통업체는 ‘생활의 허브’ 될 것
그는 최근 안정주의에서 벗어나 변화와 혁신을 택한 현대백화점 그룹을 주목했다. 대형 유통업체 중 유일하게 네이버와 손을 잡고 네이버 장보기 서비스에 입점했고 최상층 고객을 붙잡기 위해 새벽배송에 나서는 등 다각적인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정 회장은 “앞으로 오프라인 매장 체류시간을 늘리는 게 핵심이고 오프라인 매장이 온라인과 시너지를 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풀필먼트 스토어(판매상품의 입고·재고관리·분류·배송 등 상품이 고객에게 도착하는 전 과정 일괄처리)를 많이 늘릴 것”이라고 했다. 롯데마트는 현재 광교·중계점에서 매장 인근 5㎞ 이내 소비자가 주문할 경우 1시간30분 내에 물건을 즉시 배달하는 바로배송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러한 서비스를 9곳까지 늘릴 계획이다. 홈플러스도 우선 3곳을 풀필먼트센터로 리뉴얼했고 이마트는 3곳의 첨단물류센터와 함께 100여곳의 점포에서 직접배송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유통이 도시를 바꿀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았다. “온오프라인 유통 기업들은 도시계획과 건축 및 환경에 관심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신축 아파트에 생기고 있지만, 배달원과 비대면 접촉이 가능한 온라인 주문 집하 배송센터가 앞으로 신규 아파트에 장착돼야 할 거예요. 온라인쇼핑이 최적화된 도시로 변한다는 것, 곧 유통이 도시를 바꾸게 되는 것이죠. 그러는 사이 오프라인 유통업체는 통폐합으로 대형화되면서 완전한 테마파크가 될 것입니다. 대형마트는 온라인을 위한 풀필먼트화가 가속화되겠죠. 이 과정을 거쳐 오프라인 유통은 소비자들 생활의 중심, 허브가 돼야 합니다. 이처럼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펼쳐질 변화를 ‘지금, 오늘’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거죠.”
규제유령 ‘유통법’ 사각지대로 온라인쇼핑몰과 식자재 마트만 반사이익
그러나 코로나19를 견뎌내고 미래를 준비하기도 바쁜 오프라인 유통업체들은 10년 전 만들어진 ‘유통산업발전법’이라는 규제유령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통계청 기준 대형마트는 영업규제 이후 마이너스 성장 중이다. 2012년 34조원이던 매출은 2019년에 32조원으로 되레 내려앉았다. 시장점유율은 같은 기간 11.3%에서 8.7%로 줄었다. 출점보다 폐점 점포가 많다. 2017년부터 9월 현재까지 23곳이 폐점했으며 지금껏 3만2,000여명이 실직했다. 올해 롯데마트는 8곳을 폐점했고 추가로 7개 매장이 문을 닫는다. 홈플러스도 지금 계획대로라면 4개가 내년에 추가로 폐점한다.
대형마트 영업일수를 제한하면 전통시장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탁상행정의 예측은 어김없이 빗나갔다. 2010년 21조4,000억원이던 전통시장의 매출은 2018년 23조9,000억원으로 2조5,000억원 늘었지만 8년간의 물가상승률과 이 기간 동안 정부가 전통시장에 쓴 예산 2조4,833억원을 감안하면 오히려 뒷걸음질쳤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형마트가 문을 닫아도 소비자들은 전통시장에 가지 않고 온라인으로 장을 본 것이다. 통계청이 밝힌 지난해 온라인쇼핑 거래액은 134조5,000억원. 2001년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최대 규모다. 대형마트 출점제한이 시작된 2010년(25조2,000억원)에 비해 5배 증가했다. 정 회장은 “되레 식자재마트가 전국에 1,500여개로 불어나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슈퍼와 전통시장을 위협하는 존재로까지 부상하는 부작용을 낳았다”며 “심지어 영남지역 중심의 일본계 슈퍼마켓인 ‘트라이얼코리아’와 같은 외국계 유통업체들은 덕분에 급성장했다”고 꼬집었다.
전통시장 소상공인들 “이기는 쪽이 우리 편”…성공한 플랫폼과 협업이 살길
정 회장은 해외 어느 국가에서도 유통시장을 규제하는 경우는 없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중국·일본·미국은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자유경쟁하에서 각자 생존할 것만 남아 스스로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고 전한다. “일본은 오히려 전통상인과 대형 유통업체가 협력하고 상생하는 구조가 정착됐고 미국은 아마존의 공세 속에서도 오프라인 강자 월마트가 다시 부상하고 있어요. 오프라인 유통을 건너뛰고 e커머스 시장이 곧바로 열린 중국은 오히려 골목골목 오프라인 매장이 들어서는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정부가 그토록 살리고 싶어 하는 전통시장과 소상공인들이 진정 살길은 무엇일까. 온오프라인 유통업체 간에 치열한 생존 싸움이 벌어지고 이 가운데 승리한 플랫폼에 올라타 위너와 손잡고 나아가는 게 해답이라는 것. 이들 입장에서는 유통업체들이 잘될수록 좋다. 손잡을 곳이 많아져서다.
“전통시장에 입점한 이마트 노브랜드 상생스토어는 전통시장도 살고 대형 유통도 사는 묘안입니다. 여기에는 가급적 전통시장에 없는 것을 넣었어요. 소비자들이 장을 골고루 볼 수 있도록 소비자 지향적인 유통시장으로 함께 거듭날 수 있는 거예요. 최근 온라인 창업 수요가 늘면서 네이버 쇼핑 스마트스토어에 입점하는 자영업들도 많아졌습니다. 지난해 오픈한 ‘동네시장 장보기’에는 서울·경기 등 32곳의 시장이 둥지를 틀고 2시간 내에 신선 식재료와 반찬 등을 배달받을 수 있도록 했어요. 네이버의 시작으로 이제는 쿠팡이츠와 배달의민족도 전통시장 상품 배달에 뛰어들고 있잖아요. 이렇게 전통시장이 독립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면 상생 모델을 통해 생존하도록 도와야 하는 겁니다. 일본처럼 관광지화되는 곳은 남겨지고 나머지는 온라인 플랫폼으로 들어가야 맞는 거죠.”
정 회장은 결국 혁신적인 부분은 미국을, 전통적인 부분은 일본을 잘 벤치마킹해서 한국형 유통시장 구조를 새롭게 만들고 지원해주고 유도하고 가이드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심희정 라이프스타일 전문기자 yvette@sedaily.com
사진=권욱기자
◇He is…
△1970년 경남 진주 △1993년 서울대 경영학 학사 △1998년 서울대 경영학 석사 △2007년 연세대 경영학 박사 △1998~2009년 한국장기신용은행, 삼성경제연구소, 현대자동차, 이노션 근무 △2011년~ 단국대 경영학부 교수, 판교 글로벌창업혁신센터장 △2016년 현대홈쇼핑 윤리위원장 △2021~2022년 한국유통학회 회장 △현재 중소벤처기업부 중소기업정책심의회 생계형적합업종 심의위원, 관세청 면세점 특허심사위원, 네이버 해피빈재단 사외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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