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9월29일 이탈리아가 오스만튀르크를 상대로 전쟁에 들어갔다. 명분은 고대 로마의 실지 회복과 트리폴리 소재 이탈리아 국민에 대한 오스만의 차별대우. 막상 선전포고까지 마쳤지만 이탈리아군은 준비가 덜 된 상태였다. 베니토 무솔리니 등 좌파 의원들의 반대가 강해 준비할 시간이 없었던 탓이다. 이탈리아 함대는 10월3일에야 트리폴리에 함포사격을 실시하고 육군 병력의 상륙은 10월11일에야 이뤄졌다.
이탈리아가 전쟁을 벌인 속내는 따로 있었다. 늦게 통일(1860년)돼 해외 식민지를 획득할 기회가 없었다는 점을 아쉽게 생각해온 터.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는 데 늙고 힘 빠진 오스만 제국만큼 좋은 사냥감도 없었다. 오스만은 1878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전한 직후 베를린 회의를 통해 튀니지와 키프로스를 프랑스와 영국에 내준 데 이어 1880년에는 재정권의 대부분도 열강의 채권단에 넘겨버린 상황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러시아는 몰래 이탈리아를 부추겼다. 오스만과 밀접한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마침 독일 포함이 아가디르항에 입항, 모로코 독립운동을 부추기면서 발생한 제2차 모로코 위기 직후 프랑스는 리비아 지역의 광물과 수자원이 풍부하다는 정보를 흘렸다. 이탈리아는 속전속결을 자신하며 3만4,000여 병력을 보냈다. 신기술도 선보였다. 항공정찰과 폭격이 처음 등장하고 무선통신도 본격적으로 쓰였다. 굴리엘모 마르코니는 리비아 현지에서 기술자문을 맡았다.
이탈리아는 우세한 장비와 기술·병력을 갖고도 해안지역만 장악했다. 월 3,000만리라로 책정했던 전쟁비용은 8,000만리라로 뛰었다. 하지만 오스만은 세르비아·불가리아·그리스 등 발칸연합이 배후를 치고 들어오자 협상을 서둘러 리비아 지역을 이탈리아에 넘겼다. 오스만은 발칸전쟁에서도 유럽 영토의 대부분을 잃었다. 각국의 이해가 얽히고설킨 2차 발칸전쟁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이탈리아가 오스만에 고전했던 이유는 민초들의 저항. 1980년 개봉작 ‘사막의 라이온’의 실제 주인공인 쿠란 교사 ‘오마르 무크타르’ 같은 일반 민중의 저항이 거셌다. 이탈리아는 민간인 학살과 수용소 강제 수용으로 저항 의지를 잘라냈다. 파시스트로 변신한 무솔리니는 리비아를 더욱 짓눌렀다. 이탈리아는 65년 세월이 흐른 2008년에서야 ‘과거를 반성한다며 50억달러를 보상하겠다’고 확약했지만 카다피 정권 붕괴 후 감감무소식이다. 오히려 ‘리비아의 평화를 위해 국토를 셋으로 분할하자’는 방안까지 논의되고 있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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