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소중한 가치를 부여하는 대상이지만 실제로 이 가족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매우 달라진다. 얼마 전, TV프로그램에서 밀레니얼세대 신입사원들이 ‘상사에게 제일 듣기 싫은 말’의 순위를 공개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내 예상과 달리 1위는 ‘우리 애들을 잘 부탁합니다’라는 표현이란다. 청년들은 상사는 부모가 아니기에 ‘우리 아이들’이란 표현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이다. 윗세대 입장에서 직원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은 겸손한 표현이지만 젊은 세대에게 있어 ‘우리 아이들’이란 가족이외에는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며, 더구나 동등한 인격체로 관계 맺는 직장에서 적용하지 않는 단어인 것이다. 중장년에게 ‘가족 같은 회사’란 좋은 회사, 서로 배려하고 아껴주는 회사라는 의미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다르다. 아래 직원들의 무조건적인 복종과 헌신을 요구하고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 조직으로 느껴지는 달갑지 않은 표현일 수 있다.
50플러스 중장년이 젊은 세대와 소통할 때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바로 이 ‘가족화’이다. ‘딸 같이 느껴져서 하는 말인데’, 혹은 ‘아들같이 느껴져서 하는 말’등으로 타인의 사적 영역에 섣부른 개입을 하고, 심지어 자신의 기준에 비추어서 판단하여 충고하는 경우가 해당된다. 거기에 본인의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최악이다. 야근하는 회사 직원에게 ‘남편이 이렇게 매일 늦게 들어가도 뭐라고 안 해?’ ‘아이들 밥은 누가 챙겨주지?’ 라는 관심은 절대 사절이다. 이는 관심이 아니라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50대 중반의 필자 역시 얼마 전 귀가하는 택시 안에서 ‘엄마가 이렇게 늦으면 가족들 밥은 어떻게 하냐?’는 택시 기사님의 질문을 받았을 정도이니 자신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관심이 얼마나 보편적인지 모른다. 이처럼 타인의 삶에 대해 자신의 가치 판단 기준을 적용한 의견을 내는 것은 청년세대와의 소통을 방해하는 최대 요인이다. 가족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라는 뜻이지 타인의 사적 영역에 함부로 개입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공부하는 학생에게 ‘공부 잘하니?’ 라는 질문, 혹은 취업준비생에게 ‘좋은 직장에 취직해야지’ 결혼적령기가 없어진 요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특정 연령대 청년에게 ‘이제 결혼해야지~’ 때로는 ‘애는 왜 안 낳아? 부모가 되어야 진짜 어른이지’ 이런 섣부른 충고는 나를 기준으로 나의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표현들이다.
우리 사회는 일종의 ’연령압박‘이 강하게 존재하는 편이다. 아니, 적어도 중장년층은 그런 경험을 해왔다. 우리 세대는 특정 나이게 일정한 과업을 성취해야 한다는 일종의 나이 규범을 적용받아 왔다. 그러나 요즘 세대는 다르다. 자신의 선택을 최대한 존중하는 청년들에게 우리 세대가 지닌 연령기준을 적용하면 곤란하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자. 퇴직 직후 가장 듣기 싫은 질문은 ’지금 뭐하니?‘라는 불필요한 관심이다. 명함이 없어진 사람에게 명함을 요구하는 자리는 피하고 싶은 자리일 뿐 이다. 나는 덕담이라고 생각하지만 상대 입장에서 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내 기준으로 강요가 될 수 있으므로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중장년이 청년에게 제일 듣고 싶지 않은 말은 아마도 ’꼰대‘라는 단어일 것이다. 꼰대란 세상의 중심이 ’나‘에게만 있다는 일종의 이기주의에 권위주의까지 더해진 것이다. 분명 세상의 중심은 나지만 그것은 내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세상의 중심이 오로지 나라는 꼰대와 세상의 중심은 각자이므로 타인도 나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어른과는 차이가 크다. 내가 가장 소중하다고 해서 내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모든 이의 존엄의 가치는 동등하기에, 내가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니라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분명히 내가 경험했던 그때는 옳았더라도 지금은 아닐 수 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나이에 따라서 가지고 있는 시간의 양적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시간의 가치는 다르다. 지니고 있는 시간이 많은 청년에게 시간이란 실패를 의식하지 않고 도전해볼 여지가 있는 자원이다. 실패를 통해 얻을 것이 많으므로 시간 사용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반면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에게 시간이란 헛되이 써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가치이다. 따라서 더 나은 선택을 위해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시간을 써버리기보다 기존의 것을 지키고 잃지 않으려는데 우선순위를 둘 수밖에 없다. 현재 가치를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시간의 가치가 다르기에 청년에게 어떤 것을 권할 때는 실패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보다 도전의 긍정적 결과를 제시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시간의 가치가 귀한 사람에게는 그 반대이다. 나이든 사람에게 어떤 결정을 유도할 때는 무언가를 하지 않음으로써 입게 되는 손실의 가치를 우선하는 것이 어떤 일을 함으로써 생기는 긍정적 변화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이처럼 세대에 따라 처한 상황과 가치가 다르므로 상대의 입장에서 소통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50플러스캠퍼스에서 당사자 분들을 만나보면 이 분들이 사장되기에는 너무 아까운 경험과 전문성을 지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다음세대에게 본인들의 지식과 경험을 기꺼이 나눠 주고 싶어 하는 열의도 대단한 편이다. 분명 이런 50플러스세대가 가진 경험은 사회의 소중한 자산이기에 청년세대와 결합한다면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가 날 것이다. 긍정적 세대 통합을 위해 피해야 할 한 가지는 의욕을 앞세워 자신의 경험을 ‘정답’이라고 청년들에게 ‘컨설팅’하려는 태도이다. 이 때 드리는 의견으로 ‘컨설팅 말고 코칭’이다. 컨설팅은 전문가가 가지고 있는 답을 문제 해결로 제시하는 것인 반면, 코칭은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공감하고 북돋아 주는 일이다. 청년들이 갖고 있는 시간 자원을 고려할 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세대가 지닌 ‘정답’을 알려줌으로써 이들의 시행착오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해보아도 좋은 용기와 스스로 경험하려는 도전을 격려하는 것이다. 다소 시행착오를 거치더라도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게 옆에서 지원해주는 것이면 충분하다. 청년세대의 도전을 응원하는 것, 실패하더라도 기다려주는 것,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격려하는 것, 그리고 이들의 무한한 잠재력을 믿어주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다. 코로나19로 취업시장이 얼어붙고 모든 대면접촉이 제한받아 갈 곳도 없어진 지금, 한창 도전하고 달려야 하는 청년들은 우리 세대보다 더 방황하고 좌절하는 중일 것이다. 지금 우리 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그래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다른 힘듦’을 견디고 있을 청년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우리 함께 청년들을 힘껏 응원해 보도록 하자. 진짜 어른으로서 말이다.
/고선주 서울시50플러스재단 생애전환지원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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