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8년 10월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 강현화 세종학당재단 이사장이 출석했다. 이사장으로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이었다. 안민석 당시 문체위원장은 새내기 이사장에게 “국감 끝나고 하고 싶은 얘기를 원 없이 할 기회를 드릴 테니 준비해달라”고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강 이사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세종학당재단에 대한 추가 지원을 호소해보기로 했다. 문체위원들에게 교사 처우 개선과 재교육, 각 지역 세종학당의 내실화, 지역편중 해소, 양질의 문화 아카데미 운영 등의 필요성을 피력하며 예산 증액을 요청했다. 사실 말을 하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3년 동안 예산이 동결됐던 터라 이번에도 그저 지나가는 국감일 가능성이 커보였다.
하지만 강 이사장의 요청에 여야를 막론하고 모두가 호응했다. 국회는 세종학당재단에 10억원의 예산을 더 배정했다. 2020년도와 2021년도 예산도 연이어 증액됐다. 그 덕분에 전 세계 세종학당 수는 2년 사이 57개국 172개소에서 76개국 213개소로 확대됐고, 파견 교원 수는 144% 증가했다. 한국어 교육 자료도 다양해지고 한국어와 함께 한국문화를 알리는 세종문화아카데미도 30곳에서 60곳으로 늘어났다. 물론 강 이사장의 요청 때문만으로 이뤄진 성과는 아니다. 우리 말과 글에 대한 국민들의 사랑과 자긍심, 더 넓은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열망이 가장 큰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오는 9일 574돌 한글날을 앞두고 서울경제와 만난 강 이사장은 “직원들은 일이 늘어 고생하고 있지만 국민들이 한국어가 세계로 뻗어 나가는 데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신 결과라 감사할 따름”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그러면서도 강 이사장은 온라인 세종학당 및 세종문화아카데미 강화, 한국어 숙달도 평가도구 개발 등 현재 진행형 과제를 언급하면서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고 강조했다. /대담=신경립 문화레저부장 klsin@sedaily.com
세종학당재단은 국외 한국어 교육과 한국문화 보급사업을 총괄하기 위해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세계 각지에서 한국어 교육기관인 세종학당을 운영하면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알리고 한국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려 애쓰고 있다. 기관 설립의 법률적 근거도 ‘국어기본법’에 있다. 한국어가 기관의 존재 이유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지난 수년에 걸쳐 해외에서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지면서 세종학당재단 직원들은 요즘 ‘눈코 뜰 새 없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바빠졌다. 대중가요·드라마·영화·게임 등의 인기와 함께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인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글이야말로 신한류 핵심 콘텐츠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국문과 교수 출신인 강 이사장은 “교수 생활을 하는 내내 한국어 학습 수요가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늘 가지고 있었다”며 “이제는 ‘그러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단언했다. 그는 “한국어 학습 수요는 처음에는 올림픽·월드컵과 같은 국제행사에서 연유했고, 다음에는 이주 여성과 이주 노동자, 학문을 목적으로 하는 유학생이 차례로 국내로 들어오면서 계속 늘어났다”면서 “이제는 한국문화를 알기 위해, 취업을 위해 한국어를 배우려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목적이 다양해지면서 학습 수요도 계속 늘 수밖에 없다는 게 강 이사장의 설명이다.
■세종학당 입학하려 재수하기도
실제 세계 각지의 한국어 학습 열기는 뜨겁다. 강 이사장은 “러시아 모스크바 세종학당의 경우 입학을 위해 재수를 하는 사례도 있다”며 “최고급 수준의 학습자들은 한국 고전을 읽을 정도”라고 말했다. 발트해 연안 국가인 리투아니아의 경우 우리 교민이 20명 남짓인데 세종학당 두 곳의 수강생 수가 800명에 달할 정도다. 이 모든 현상에 대해 “한류에 대한 관심이 한국어로 확대된 결과”라고 강 이사장은 말했다.
최근에는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서 현지인 한국어 교사가 세종학당에서 배출된 일도 있었다. 한국어 학습 수요에 비해 교원 수가 크게 부족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올해 세종학당이 처음 도입한 현지 교원 양성 과정을 통해 23명이 보조교사 자격을 얻었다. 이들은 일정 기간 세종학당 교원들과 함께 교안을 작성하고 수업을 참관하면서 한국어 교육 실무를 익히게 된다. 강 이사장은 “베트남에는 세종학당이 11곳 있는데 그래도 넘치는 수강자를 모두 수용하지 못한다”며 “호찌민 소재 거점 세종학당은 아예 현지에서 교재를 출판해 사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에 이어 2위 인구 대국인 인도에서의 한국어 인기도 주목된다. 최근 인도 교육당국은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정식 채택했다. 강 이사장은 “학습자가 급증하는 지역들은 모두 제2외국어 채택에 있어 잠재적인 대상 국가로 보고 노력해야 한다”며 “정규 교육과정 편입은 결국 해당 국가 교육부의 정책적 결단이지만 우리 정부도 함께 노력할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어떤 형식으로든 제도권 교육 안에 한국어가 들어가 있는 국가는 30곳이 넘는다. 강 이사장은 “여기에는 한국의 경제성장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분석하며 인도에 이어 한국어가 정식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은 국가로 터키를 꼽았다.
■예산 늘었지만 일본의 30% 도 안돼
이처럼 한국어 학습 수요는 매년 기대 이상 수준으로 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예산은 여전히 부족하다. 영국·프랑스·독일처럼 오랫동안 자국어 해외 보급사업을 해온 국가들은 한국보다 8배 이상 많은 예산을 매년 배정하고 있다. 세종학당재단의 올해 예산이 2,900만달러 수준에 그치는 반면 세종학당과 유사한 기관인 프랑스 ‘알리앙스 프랑세즈’의 예산은 2018년 기준 2억5,000만달러 수준이다.
후발주자인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난다. 중국은 중국어와 중국문화 전파의 첨병인 세계 각지의 공자학원과 공자학당에 2018년 한 해 동안 2억9,500만달러를 투입했다. 한국의 10배다. 일본도 우리나라보다 3배 많은 9,700만달러를 일본어 보급사업 지원에 썼다. 강 이사장은 “국민들이 관심을 갖고 국회도 세종학당재단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최근 예산이 늘어났다”며 “그래도 다른 국가들에 비하면 예산 규모가 작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내년도 세종학당재단 관련 예산으로 510억원을 편성했다.
강 이사장은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우수 교원을 많이 뽑고 교원 직무 안정성도 높여야 한다”며 “교재 경쟁력 강화, 한국어 학습자에 대한 장학금 지급 및 취업 연계 등이 장기적인 성과를 위해 필요하다”고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에 더해 한국어 숙달도를 평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 강 이사장은 “교육부가 관리하는 한국어능력시험 토픽(TOPIK)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대학 수학 등을 위한 고급 지표”라며 “관광·통역 가이드, 현지 기업 취업 등 실무적인 측면에서 한국어 숙달도를 평가할 수 있는 공인평가제도를 한국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2022년까지 전 세계 270곳까지 확대 목표
세종학당재단은 오는 2022년까지 세종학당 수를 270곳까지 늘린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한국 기업이 20개 이상 진출한 도시에는 세종학당을 1곳 이상 지정해 운영하겠다는 것이다. 강 이사장은 “세종학당의 증가 추이를 보면 아시아를 중심으로 늘던 한국어 교육 수요가 유럽과 북아메리카를 거쳐 최근에는 남미와 아프리카로 확대되고 있다”며 “이 같은 수요 흐름에 맞춰 세종학당을 설립하는 등의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재 세종학당은 아시아 지역에서 114곳이 운영되고 있다. 전체의 절반 이상이다. 반면 아메리카 지역의 경우 북미·남미를 통틀어 32개소, 아프리카 지역에는 10개소에 그친다.
강 이사장은 “세종학당의 지역편중 해소가 필요하다”며 “수요는 있지만 현지 한국어 교육기관이 부족한 지역을 중심으로 전략적으로 세종학당을 확대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BTS, 기생충처럼 한국어도 인기”
일각에서는 해외 한국어 보급사업을 두고 왜 국가 예산을 외국인에게 쓰냐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 강 이사장은 “언어 전파가 아니라 세계와의 동반성장이라는 큰 관점에서 바라봐달라”고 당부했다. 강 이사장은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 방탄소년단(BTS)의 빌보드 1위 석권 등으로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과 인정이 잘 알려진 것에 반해 한국어 학습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은 잘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다”면서 “K팝·K드라마 등을 통해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외국인들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고 나면 한국의 ‘진짜 친구’로 거듭난다”고 강조했다.
강 이사장은 이어 “한국어 보급을 통해 한국을 이해하는 외국인이 늘어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세계와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통로가 넓어지는 것”이라며 “소통과 교류를 통해 우리가 세계 시민으로 함께 성장하는 유익한 일”이라고 역설했다. /정리=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사진=성형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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