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번도 행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던 스물아홉의 그 겨울을 기억한다. 그 깨달음은 못 견디게 아프기도 했지만 커다란 해방감도 동시에 가져왔다. 어떻게 해야 ‘부모님의 착한 큰딸’이라는 감옥을 벗어날 수 있을지, 그것만 생각했다. 나의 삶을 찾아야만 부모님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었다. 나는 엄마가 날리는 방패연이었다. 얼레는 엄마가 꼭 붙들고 있었다. 엄마가 실을 잡아당길 때마다 나는 더 높이, 더 빨리 하늘을 날아야 했다. 내가 날고 싶어 나는 게 아니었다. 엄마의 기대와 집착이라는 얼레가 나를 억지로 날게 했다. 나는 엄마의 기대만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부모님은 지극히 착한 사람들이었지만, 나를 향한 사랑에는 ‘네가 잘 되어야 우리가 잘 살 수 있다’는 기대감이 떠나지 않았다. 그 기대감이 나를 무시무시한 힘으로 옥죄고 있다는 사실을 부모님은 몰랐다.
엄마, 이제 제발 나를 붙잡고 있는 그 얼레의 실을 끊어줘. 나는 그렇게 부탁하고 싶었다. 아직 그럴 용기가 없었다. 엄마를 실망시키는 딸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내 안의 단호함을 가로막았다. 얼레가 절대 날 놓아주지 않으니, 내가 갑자기 하늘 높은 곳에서 강력한 돌풍을 만나 홀로 갑자기 끊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려면 일단 높이 올라가야 했다. 내가 아무리 멀리 날아가도 엄마가 얼레를 계속 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 번도 부모님의 뜻을 거슬러 본 적 없는 모범생, 착한 큰딸, 집안을 일으켜야 하는 존재라는 부담감으로 얼룩진 이 얼레의 줄을 끊을 기회가 찾아왔다. 첫 번째 유럽여행이었다. 아르바이트로 열심히 돈을 모아 간신히 첫 번째 유럽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멀리, 그렇게 오랫동안 가족을 떠나본 적은 처음이었다. 미치도록 좋았다. 유럽이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엄마의 집착어린 사랑이라는 얼레로부터 탈출할 기회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렇게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존재인데, 아무런 직업도 아무런 계획도 없이 살아도 그토록 행복할 수 있는 존재인데, 그동안 집과 학교밖에 모르는 갑갑한 모범생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의 얼레’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내 고통을 전가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모든 게 엄마 탓’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나아졌으니까, 내 문제가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스스로 착한 딸이 되고 싶었다. 내가 모범생이 되고 싶었다. 칭찬만 받고 싶었다. 비난은 죽어도 싫었다. 그제야 그런 내 자신이 너무 싫어졌다. ‘나를 이렇게 만든 건 엄마’라고 생각했고, 엄마를 원망하는 마음으로 탈출을 기획했다. 사실 언제든 그 착한 딸의 굴레에서 도망칠 수 있었는데, 착한 딸이 되고 싶은 나의 욕망이 나를 막아 세웠다. 적어도 착해 보이는 딸은 되고 싶었다. 이 세상 큰딸들은 대부분 그런 엄청난 기대 속에 살아간다. 동생들은 부모 속을 좀 썩여도 되지만 나라도 속을 좀 덜 썩이자. 집안이 어려우면 큰딸부터 소녀가장이 된다. 그래서 나 또한 더욱 부모님께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런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나도 독립을 해야 했지만, 부모님도 나로부터 독립을 해야 했다. 도대체 언제 나는 진짜 나의 삶을 살지. 언제 진짜 나만의 삶을 살 수 있지. 그런 생각을 하면 너무나 아팠다. 그러다 첫 번째 유럽여행을 떠났을 때 탈출의 길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학교가 없어도 살 수 있겠구나. 어쩌면 학교가 내 행복을 가로막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나는 그해 겨울 엄청난 투쟁 끝에 마침내 ‘독립’에 성공했고, A4 한 장 크기의 귀여운 창문이 달린 원룸으로 이사했으며, 부모님의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글쟁이’가 되었으며, 이제 내가 스스로 그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줄로만 알았던’ 방패연의 얼레, 엄마라는 이름의 굴레로부터 해방됐다. 사랑하지만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엄마 또한 나처럼 성장했다. 사랑을 ‘같이 꼭 붙어 있는 것’으로밖에는 표현하지 못했던 엄마는 내가 떠난 뒤에야 깨달았을 것이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 어딘가로 도망가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존재는 더 멀리 있어야, 더 높이 날아갈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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