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10월 12일 독일 점령하의 벨기에 브뤼셀. 오전 7시 스카르베크 국립사격장에서 독일군 2개 처형분대가 ‘전쟁반역자’들에 대한 총살형을 집행했다. 독일군 병사 한 명은 발사와 확인 사살 명령에 총을 내려놓았다. 여성을, 그것도 병사들을 극진히 보살펴 온 간호사를 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병사 역시 명령 불복종 죄로 총살형을 받았다. 사형 집행관 폰 호프 버그 대위는 이미 죽은 간호사의 머리에 권총을 발사해 확인사살 절차를 마쳤다.
독일군에 총살당한 간호사는 영국 출신 에디스 카벨(Edith Cavell·49세). 성공회 목사인 부친을 간병하다 30세에 간호사 수습교육을 받았다. 신설 벨기에 간호학교에 초빙돼 제자들을 교육하던 중 1차 세계대전을 맞았다. 독일에 점령당한 뒤 국제적십자병원으로 운영된 간호학교에서 교수 겸 선임간호사를 맡았던 카벨은 독일과 벨기에, 영국 등 국적을 가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부상병을 돌봤다.
다른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부상한 연합국 장병을 치료한 뒤 서류를 허위로 꾸며 중립국인 네덜란드로 피신시켰다. 독일에 포섭된 프랑스인의 밀고로 1915년 8월 체포된 그는 세 차례 경찰 심문에서 혐의를 순순히 털어놓았다. 영국군 60여 명과 프랑스군 15명이 그를 통해 돌아갔다. 독일은 부상병뿐 아니라 입대적령기의 벨기에·프랑스 청년 100여 명을 탈출시킨 점을 독일에 대한 명백한 적대행위로 꼽고 사형선고를 내렸다.
카벨의 사형 소식에 미국과 스페인 대사 등이 ‘세계적으로 반독일 감정이 퍼질 것’이라며 구명을 호소했으나 총살은 실행되고 말았다. 총살 직전 찾아온 성공회 목사에게 카벨은 이런 말을 남겼다. ‘애국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랑해야 하고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카벨 총살 직후부터 연합국은 ‘여성 간호사에 대한 독일의 야만적 살해’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당황한 빌헬름 2세 독일 황제는 적십자요원으로 위장한 첩자에 대한 총살은 적법한 것이라고 강변했으나 더 큰 분노를 일으켰다. 주요 연합국의 신병 지원율이 두 배로 뛰었다. 독일의 항변이 맞을지도 모른다. 카벨이 첩자 임무까지 수행했다는 문건도 적지 않다. 하지만 여성 간호사를 죽인 독일의 행태는 자해성 이적행위라는 결과를 낳았다. 무엇보다 미국에서 참전여론이 들끓었다. 전쟁이 끝난 뒤 영국 노리치 성당에 다시 묻힌 에디스 카벨의 이름은 여전히 기억된다. 유명 가수가 그의 이름을 따 개명한 적도 있다. 캐나다 자스퍼 국립공원의 최고봉에도 이디스 카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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