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 미만 아동 A양은 옆집에 사는 B씨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첫 사건은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일어났다. 신문 배달을 나간 부친이 없을 때 찾아온 B씨는 A양의 몸을 만지고 자신의 몸을 쓰다듬게 했다. 며칠 후 B씨는 A양을 강제로 자신의 집에 끌고가 같은 행위를 반복했고 결국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미성년자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됐다. 문제는 법정에서 발생했다. B는 A양의 아버지 C와 합의를 했고 A양이 법원에 처벌불원서를 제출한 것이다. 이 처벌불원서의 효과는 어디까지 일까.
성폭력·성추행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 과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일들도 지금은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고 법정에서도 피해자들의 권리가 존중받고 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가해자들은 합의를 통해 형량을 줄이려 한다. 피해자가 어린 아동이라면 법적 권한을 대신 갖는 부모와 만나 합의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때 피해자 아동의 권리는 사라지게 된다.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다. 미성년자인 A양은 1년 가까이 진행된 재판 과정에서 가해자 B에 대한 처벌 의사를 드러냈다. 하지만 B는 아버지인 C와 합의서를 작성하는 방식으로 A양을 압박했다. 결과적으로 A양은 처벌불원서를 쓸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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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이 사건을 어떻게 판단했을까. 1심은 A양의 처벌불원서의 효과를 인정했다. 1심 재판부는 “죄질이 좋지 않고 범행으로 피해자가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양형에 반영했다. 재판부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고 결국 B씨는 석방됐다. 검찰은 형량이 가볍다며 항소했고 2심은 다른 결정을 내렸다. A양이 B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밝힌 것은 진심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재판이 빨리 마무리되길 바라는 주변의 압력을 의식해 어쩔 수 없이 처벌불원서를 냈다는 것이다. 2심 재판부는 “법원이 피해자를 면담한 결과 용서의 의사표시는 사건 조기 종결을 바라는 주변의 압력을 의식해 이뤄진 것이고 사실은 B씨의 처벌을 바라는 것에 가깝다”고 밝혔다. 특히 A양은 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 탓에 이성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등 일상 생활에서도 고통을 겪고 있었다. A양의 변호사 역시 A양의 아버지 C와 가해자 B의 합의 과정에서 A양의 이익이 우선되지 않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2심은 B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B는 상고를 했지만 대법원의 판단도 같았다. 대법원 재판부는 “B씨가 A양 아버지를 통해 A양에게 무리한 합의를 요구한 것으로 보이는 정황 등으로 A양의 처벌불원 의사가 진실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이경운기자 cloud@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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