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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문특파원의 차이나페이지] <69> 대만·中 줄다리기에 제자리 못 찾는 신해혁명

■109주년 맞은 아시아 최초 공화혁명

중국에서 국경절 연휴 기간인 지난 1일 베이징 톈안먼광장을 찾은 관광객들이 쑨원의 초상화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AP연합뉴스




홍콩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 제정 이후 홍콩의 정치·사회 상황이 크게 변화했는데 이는 ‘신해혁명’에 대한 평가도 포함된다. 홍콩에서의 신해혁명 기념이 자유로운 선택 행위로부터 위험한 이적 행위 변한 것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10월10일 신해혁명 기념일인 쌍십절(雙十節) 행사가 올해는 홍콩에서 금지됐다. 신해혁명을 기념하는 이들은 대개 친(親)대만파이고 쌍십절 행사에는 대만(중화민국)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靑天白日滿地紅旗)’를 들고 나온다. 이것이 지난 6월 제정된 홍콩보안법에 저촉된다는 것이 홍콩 정부의 유권해석인 셈이다. 영국의 식민통치 시기에 이어 1997년 중국으로의 주권 반환 이후에도 큰 문제 없이 진행된 기념행사가 ‘법률’ 하나 제정에 불가능하게 된 것이 지금의 홍콩의 현실인 셈이다.

이날 홍콩 친대만파의 본거지 격인 툰먼 훙러우에서의 집회도 경찰 등의 사전 봉쇄로 무산됐다. 훙러우는 1905년 쑨원(손문)이 이끈 흥중회의 본거지였던 곳으로 이후 쑨원이 주도하게 된 신해혁명의 홍콩 내 상징이기도 하다. SCMP는 “이날 집회조직자들은 보안법에 대한 우려에 (신해혁명으로 탄생한 중화민국의 국기였던) 청천백일기를 참가자들이 펼치지 못하게 했다”고 전했다.

같은 날 대만에서는 쌍십절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대만의 정식 명칭은 ‘중화민국’이고 쑨원은 중화민국의 ‘국부(國父)’다. 대만의 정통성을 위해서는 신해혁명 부각이 필수적이다. 다만 대만에서의 쌍십절 행사가 과거 중국을 변화시킨 신해혁명에 대한 기억보다는 점차 대만 자체적인 독립 분위기 조성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최근 추세다.

대만 중앙통신에 따르면 차이잉원 대만 총통(대통령)은 이날 기념사를 통해 최근의 잇따른 중국의 압박에 대해 결연한 반중국 노선을 주장했다. 차이 대통령은 이날 “약한 척하며 뒤로 물러난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면서 “굳건한 방위 의지와 군사력을 갖춰야만 대만의 안보를 보장하고 지역의 평화도 수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바다 건너편(중국)의 군사적 확장과 도발에 대해 우리는 방위력 현대화를 강화할 것”이라고도 했다.

이에 대해 대만 업무를 담당하는 중국 국무원 대만판공실은 이날 곧바로 “차이잉원은 대결적 사고와 적대 의식을 드러낸 채 (대만) 독립을 부추기고 있다”며 “대결의 길에는 출구가 없고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 역시 나쁜 결말만 초래할 뿐”이라고 반박했다.

민주진보당 집권의 대만에서는 신해혁명과 쑨원의 선명성 보다는 반중국·독립에 쌍십절을 활용하는 것이고 중국은 이에 대해 반발하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 중국 군용기들은 쌍십절을 하루 앞둔 9일에도 대만해협을 건너 대만 방공식별구역에 들어가 무력시위성 군사 활동을 벌였다.

중국에서는 10일의 신해혁명을 기념하거나 기억할 수 있는 어떠한 행사도 없었다. 베이징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톈안먼광장과 주위에는 이날이 쌍십절임을 깨우칠 표식 하나 나붙지 않았다. 신화통신 등 중국 관영매체에도 ‘신해혁명’과 관련된 기사가 없었다. 중국에서는 앞서 1일부터 8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기념일인 국경절 연휴를 마친 후 이날은 대체근무일로 지정돼 일상적인 출근이 이뤄졌다.

물론 ‘사건’은 있었다. 일본 니케이비즈니스는 소속 기자가 이날 자금성 인근 중산공원에 입장하려다 공안에게 거부됐다는 기사를 실었다. 중산공원의 ‘중산’은 쑨원의 호로, 그가 1925년 베이징에서 사망한 후 잠시 동안 이곳에 있는 한 건물에 안치된 것을 기억해 나중에 공원화하면서 이 이름으로 바꿨다. 중국 당국이 신해혁명이 언급되는 것을 피하려고 외신기자의 출입 자체를 봉쇄한 셈이다. 니케이비즈니스는 “중국 공산당은 절대로 신해혁명을 기억하는 행사를 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는 중국이 자신의 영토라고 하는 대만에서 같은 날을 기념하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은 전제군주 국가인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들어선 사건을 말한다. 신해년에 벌어진 일이라서 신해혁명이라고 부른다. 1911년 10월10일 후베이성 우창(지금의 우한)에서 공화제를 추종하는 일부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것이 전국으로 확대된 결과 이듬해인 1912년 1월에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이에 따라 중국은 공화제 체제로 진입하는데 신해혁명은 아시아 국가가 이룬 첫 ‘공화혁명’으로 기록됐다.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임시대총통)이 쑨원이었다. 쑨원 우창봉기 자체를 지휘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광범위하게 반청 지도자로 추앙받으면서 자연스럽게 공화국의 첫 수장이 된 것이다. 때문에 신해혁명과 쑨원이라는 이름은 늘상 따라 다닌다. 올해는 신해혁명이 일어난 지 109년 되는 해다.

문제는 이 신해혁명의 해석이다. 신해혁명에 성공하고 중화민국이 성립된 후에는 잠시 동안에는 신해혁명에 대한 해석이 일치했다. 민족혁명이자 공화혁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곧 정파에 따라 해석이 갈라졌다.

신해혁명 후 40년도 안돼 중국 공산당은 중화민국을 밀어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중화민국의 국민당은 대만으로 피신해 지금까지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에 따라 신해혁명에 관한 해석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산당과 중화민국(대만)의 국민당으로 양분됐다. 대만에서 국민당 일당독재가 무너지고 민주화된 이후 더 복잡해졌다. 현 차이잉원 대통령을 배출한 대만의 집권 민주진보당(민진당) 세력은 신해혁명의 계승자임을 분명히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신해혁명 관련한 해석은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민진당 등 3가지로 나뉜다. 우선 중국 공산당의 해석이다. 중국 공산당은 중국 대륙을 차지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독재정당이기 때문에 공산당의 해석은 곧 중국의 해석이다.

중국의 공식 해석에 따르면 신해혁명은 ‘중국의 민족부르주아인 혁명 민주파가 지도하고, 자본주의 사회제도에 의해 부패하게 된 반(半)식민지·반(半)봉건 사회를 대신해 밖으로는 열강을 막고 안으로는 공화국을 세우려 한 혁명운동’으로 규정된다. 쑨원은 여기서 민족부르주아 혁명파의 최고 지도자로 취급된다.

다만 이러한 해석에는 곧바로 신해혁명의 한계가 따라 붙는다. 신해혁명이 2,000여년의 전제정치를 종식 시켰지만 민족독립과 인민해방이라는 궁극적 임무는 달성하지 못한 채 미완의 혁명으로 남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미완의 혁명’을 최종 완성 시킨 주체는 1949년 신중국 성립과 사회주의 혁명을 이끈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이라는 논리로 이어진다.

지난 10일 대만의 타이베이에서 진행된 쌍십절 기념행사에서 ‘청천백일만지홍기’가 나부끼는 가운데 코로나19 방역에 앞장선 의료진을 태운 차량이 퍼레이드를 진행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당연히 대만의 해석은 다르다. 신해혁명을 ‘분명한 혁명으로 전체 국민의 참가에 의한, 전체 국민의 이익을 위한 국민혁명’으로 본다. 쑨원과 뒤를 이은 장제스의 국민당은 신해혁명을 성공 시켜 중화민국을 세웠고 이를 발전시키고 있었지만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대만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신해혁명의 정당한 계승자는 국민당이라는 것이 대만의 공식 담론이다.

다만 대만 안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중국에서 밀려 대만으로 온 국민당 세력은 원칙적인 입장을 유지하지만 원래의 대만인들이 주축인 민진당은 신해혁명 옹호에 소극적으로 바뀐 것이다.

민진당이 이미 신해혁명이든지 중국, 쑨원 등과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중국 내외의 지적이다. 이는 대만은 ‘중국’과 상관없는 ‘대만’이라는 주장이 이어진다. 이른바 ‘대만 독립’ 문제다. 그동안 대만 공휴일이었던 ‘국부 탄신일’은 차이잉원 집권 1기 시기인 2017년부터 공휴일 명단에서 빠졌다. 이와 함께 관공서와 학교에서 쑨원의 초상화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중국인인 쑨원이 대만 독립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 민진당의 저변에 깔린 생각인 셈이다. 물론 이러한 행동에 중국은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스스로는 신해혁명과 쑨원의 이미지 확산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면서 남(대만)의 쑨원 이미지 제거에 대해 불편한 것이 중국의 아이러니한 입장이다. 국민당의 창설자인 쑨원은 초기 공산당을 자신의 당에 받아들여 이후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줬다. 공산당이 이후에 쑨원을 계승한 장제스와 갈라서기는 했지만 어쨌든 쑨원은 은인이다.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쑨원에 대해 혁명선행자(革命先行者)라고 부르고 있다. 쑨원의 무덤은 난징에 있는데 웬만한 황제 무덤보다 더 크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을 이은 이후에도 무덤은 원래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2016년 11월11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쑨원 탄생 150주년 기념식에서 “중국 공산당이 ‘쑨원 정신’의 계승자”라고 언급한 바 있다. 중국은 국경절이나 전승절 등의 대형 행사에 쑨원도 포함시키고 있다. 올해 10월 1일 중국의 건국기념일인 국경절 기간에도 톈안먼광장에 쑨원의 대형 초상화가 등장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2016년 11월11일 쑨원 탄생 15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공산당으로서는 대만의 흡수통합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신해혁명과 쑨원이 필요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공산당 외에 중국의 모든 정파를 아우를 수 있는 상징이 혁명의 시작으로서의 신해혁명과 혁명의 첫 지도자인 쑨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만의 국민당이 ‘상표권’을 선점한 상황에서 이들을 너무 앞세우면 공산당의 절대 지위가 흔들린다는 것은 딜레마다.

/베이징=최수문특파원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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