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초기 승려인 균여의 삶을 다룬 ‘균여전’에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희랑공은 우리 태조 대왕의 복전(福田·스승)이 되었다.” 여기서 희랑공은 신라 말~고려 초 고승인 희랑대사다. 대사가 언제 태어났고 입적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다. 하지만 그가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이었다는 기록은 1075년에 편찬된 균여전 외에도 조선의 관료 유탁기가 쌍계사·해인사를 둘러보고 쓴 기행문인 ‘유가야기(1712년)’와 민간의 고서인 ‘가야산 해인사 고적(1874년)’ 등에 등장한다.
고서들의 기록을 종합하면 신라 말 가야산 해인사에는 희랑·관혜 두 고승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화엄학의 대가였다. 그러나 서로 추구하는 길이 달라 희랑의 법문은 북악(北岳), 관혜의 법문은 남악(南岳)이라고 불렸다. 법문의 차이만큼 운명도 크게 달라졌다. 희랑은 왕건의 스승으로, 관혜는 후백제 견훤의 스승으로 각자의 길을 갔다. 결국 왕건이 최후의 승자가 되면서 관혜의 남악은 몰락하고 희랑의 북악이 득세했다.
희랑이라는 이름은 대사가 수도에 정진하던 해인사 암자 희랑대(希朗臺)에서 따왔다. 희랑대는 지금도 해인사에 남아 있다. 왕건과 희랑대사의 인연은 ‘가야산 해인사 고적’ 등에 나온다. 해인사 인근에서 후백제군과 전투를 벌이던 왕건이 전세가 불리해지자 당시 해인사 주지인 희랑대사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기겠다며 도움을 간청했다. 이를 수락한 대사가 승병을 보내 후백제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이를 계기로 왕건은 해인사 증축에 필요한 토지를 하사하고 국가 중요문서를 이곳에 보관했다.
문화재청이 21일 희랑대사 모습을 조각한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 좌상’을 국보(제333호)로 지정했다. 본래 보물이었던 이 작품은 높이 82.3㎝의 등신상으로 10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베 등에 옻칠해 여러 번 둘러서 형상을 만드는 건칠(乾漆) 기법이 사용됐다. 희랑대사좌상이 실제 생존했던 고승을 재현한 국내 유일의 국보급 조각품이라니 잘 보존해 먼 후세에까지 전해졌으면 좋겠다.
/임석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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