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외면했던 노동개혁 이슈가 국회에서 공론화될 조짐이다. 지난달 5일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공정경제 3법만이 아니라 노동관계법도 손봐야 한다며 노동개혁에 불을 댕겼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야당의 기습 제안에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위기 상황에서 노동자를 더 힘들게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개혁 입법을 지연하기 위한 야당의 몽니 정도로 평가 절하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의 이후 행보를 보면 정기국회용 임기응변만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는 지난달 28일 한국노총을 방문해 보다 분명하게 노동시장 개편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양극화를 이대로 방치할 수 없고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열어가려면 노사관계 개선과 노동법 개정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우리 사회에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된 문제 제기다. 이달 초 외부인사까지 포함한 노동개혁특별위원회를 설치하겠다며 한국노총의 협조를 당부하기까지 했다.
야당이 앞장서 노동개혁을 요구하고 여당과 노동계의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상황은 뜻밖이지만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동안 고용노동정책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전문성을 자랑하면서도 노동계가 좋아할 만한 몇몇 과제에만 집중할 뿐 노동시장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이제 와 갑자기 태도를 바꾸기도 어렵다. 이미 벌려놓은 한국판 뉴딜과 고용위기 극복만 하더라도 힘에 부치는 상황이다. 정기국회에서 처리해야 할 과제도 산더미다. 탄력근로 확대와 택배노동을 비롯한 특수고용직의 사회안전망 정비,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비준을 위한 노조법 개정 등 만만치 않은 숙제가 쌓여 있다. 이런 정책의 빈 공간을 야당이 치고 들어온 것은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이다. 국민의힘 입장에서도 노동개혁은 내년 이후 전개될 정치 일정까지 고려할 때 자신들이 이니셔티브를 쥘 수 있는 매력적인 의제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지난 20년간의 노동개혁이 항상 대통령 프로젝트였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이 의제를 던지고 사회적 대화 기구의 숙성을 거쳐 국회로 넘어가는 개혁의 알고리즘은 이미 관행으로 굳어졌다. 문재인 정부도 이 패턴을 따랐다. 야당이 노동개혁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여론을 일으키더라도 정부 여당이 호응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야당의 노동개혁 이니셔티브가 소모적인 정치 공방으로 흐르지 않으려면 여야의 정치적 타협이 반드시 필요하다. 개혁의 성공사례로 자주 인용되는 독일이나 네덜란드도 노동개혁을 위한 초당적인 합의와 협치가 성공의 보증수표였다. 독일 하르츠 개혁의 성공에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의 리더십만이 아니라 노사와 관료 조직의 저항을 버텨낸 초당적인 합의와 협력이 결정적이었다. 우리는 대통령 주도의 사회적 대타협으로 국회를 압박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대타협의 정치적 성과를 대통령이 독점하고 야당은 들러리가 되거나 개혁에 사보타주를 놓고는 했다. 노동개혁이 지지부진했던 큰 이유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타협의 첫 성과로 자랑하는 탄력근로 관련법 개정안이 20대 국회에서 폐기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렇다고 국회 주도의 노동개혁이 더 좋은 성과를 낸 것도 아니다. 지난 1989년 여소야대 국회에서 노조 단결권을 대폭 확대하는 야당 주도의 노동법 개정이 있었지만 대통령은 시기상조라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2013년에는 여야합의로 60세 정년을 법제화했지만 충분한 사회적 합의 없이 정치적으로 결정함으로써 고용시장을 혼란에 빠트렸다는 평가다. 대통령제에서 국회 주도의 노동개혁은 쉽지 않다는 방증이다.
남은 길은 오직 하나, 대통령과 경사노위, 여야 정당과 국회를 아우르는 노동개혁의 거버넌스를 새로 짜는 수밖에 없다. 대통령 주도의 사회적 대화의 장점은 살리되 단점을 보완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협력의 길은 국회에 제출된 노동 관련 법안을 중심으로 여야 타협안을 만들고 이와 병행해 국민의힘이 제기하는 보다 포괄적인 노동시장 개편 방안을 실행할 행동계획을 합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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