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 팬데믹으로 ‘K-방역’이 주목받고,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등 아이돌 그룹의 인기에 힘입어 ‘K-팝’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조용히 인기 상승 중인 ‘K’가 또 하나 있다. 바로 ‘K-푸드’다. 감염병으로 세계 교역이 위축된 와중에도 김치와 라면, 만두, 과자, 빙과 등 국산 식품류의 수출액은 계속 증가세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김치와 라면 수출액은 지난 3·4분기까지 전년동기대비 각각 36.3%와 38.5%씩 늘어 올해 역대 최고 수출액 기록 경신이 확실하다. CJ의 비비고 만두는 올해 글로벌 매출이 처음으로 1조 원을 넘어설 전망이고, 오리온은 러시아에 초코파이 공장을 또 짓기로 했다. 미국 뉴욕에서 베트남 하노이에 이르기까지 한국 관광객보다 현지인이 더 많이 찾는 한국 음식점을 찾기란 결코 어렵지 않은 일이 됐다. 100여 년 전만 해도 물 건너온 과자 한 봉지, 위스키 한 병에 신기함을 감추지 못했던 한국인의 입맛이 이제는 오히려 세계 각지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 음식이 세계 무대로 나가기까지 한국인의 식탁은 어떤 변화를 거쳤을까. 음식인문학자인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구한말 개항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음식의 근현대사를 정리한 책을 냈다. 1876년부터 2020년까지 144년 동안의 변화를 개항·식민지·전쟁·냉전·압축성장·세계화라는 6개의 키워드에 맞춰 시대별로 세분화한 ‘백년식사’이다. 단순히 민족주의를 자극할 법한 에피소드를 늘어놓은 게 아니라 다양한 사료 분석을 통해 한국 음식문화의 변천사를 설명한다.
19세기 개항기는 서양 음식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유입된 시기다. 또 한국 음식이 다른 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1876년 일본에 의해 강제 개항된 조선은 이후 미국, 독일,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와도 줄줄이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조선을 찾는 외국인이 급격히 늘었고, 이들은 이국에서의 식사를 걱정해 자국 음식이 든 통조림을 잔뜩 싸 가지고 왔다. 개항 직후 조선을 여행한 프랑스 지리학자 샤를 루이 바라는 와인에 푸아그라 통조림까지 챙겨왔다. 흑심을 품고 찾아온 외국인들을 풍성하게 대접하기 위해 고종은 서양인 요리사까지 초빙해 프랑스식 정찬 코스를 내놓았다. 아스파라거스, 파인애플, 푸아그라, 송로버섯, 커피, 코냑 등이 황실의 식탁에 올랐다.
일제 식민 지배 기간 동안 한국인의 입맛은 점점 더 외래 음식에 길들여졌다. 식민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1910년 17만 명에서 1944년 71만 명까지 늘어나면서 일본식 빙수와 두부가 유행했고, 일본식 공장제 간장, 화학조미료 아지노모토 등이 조선인의 입맛을 서서히 장악했다. 반대로 조선의 불고기와 명란젓이 일본에서 야키니쿠, 멘타이코로 불리며 인기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식민 지배에 따른 고통은 그들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에 휘말리면서 더욱 커졌다. 게다가 일본의 패망 후 5년 만에 다시 한국전쟁이 벌어졌다. 극심한 식량 부족은 한국 음식문화를 크게 바꿨다. 조선총독부는 곡물을 수탈해 가면서 감자가 쌀보다 값이 싸고 영양가도 많다면서 감자 잡채, 감잣국, 감자 과자, 감자 밥 등의 요리법을 홍보했다. 면미(麵米)라는 인공 곡물을 배급하고, 밀가루로 만든 국수인 소면과 호떡을 장려했다. 멸치와 번데기, 메뚜기 역시 이때 대용식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냉전 시기 유엔과 미군이 원조·구호 물품으로 밀가루를 보내오면서 밀가루로 만든 음식이 더욱 늘어났다. 국수, 수제비, 빈대떡, 풀빵이 유행했다. 정부가 분식을 적극 장려하면서 한국식 라면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한국식 치킨 역시 분식 장려 운동의 결과물이었다. 일본의 공장제 식품기업 모방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오비맥주, 샘표식품, 몽고간장, 서울우유, 크라운제과, 미원, 롯데삼강, 서울식품, 삼양식품, 오뚜기 등이 식품 대량 생산에 나섰다. 1970년대부터 이들은 라디오 광고를 시작했고, 전국적 유통망도 갖췄다.
1970년대 이후 압축성장과 세계화로 한국인의 식탁에는 다시금 새로운 외국 음식이 넘쳐났다. 1980년 대부터 삼겹살 구이, 갈빗집 등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1990년에는 패스트푸드점이 문을 여는 등 음식 문화도 급속도로 다양해졌다. 시장 개방과 90년대 외환 위기로 일부 식량 주권을 바닥에 내려놓은 대신, 한국인의 입맛은 더욱 세계화했고 오늘날 한국 음식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기반이 됐다.
저자는 오늘날 유행하는 ‘K-푸드’는 지난 140여 년 동안 사회 문화적 격변을 겪은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강제 개항 이후 큰 변화를 쉴새 없이 겪는 동안 외국 식품을 수용하고 한국화한 결과라는 것이다. 단순히 ‘우리 전통음식이 최고’를 외칠 게 아니라 한국 음식의 역사를 제대로 들여다봐야만 앞으로 한국 식탁에 들이닥칠 여러 변화에도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메시지다. 2만 원.
/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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