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받았던 혹평 중에 ‘평범한 연기는 잘 못한다’는 게 있었어요. 이것 또한 제가 도전해봐야 하는 부분이고, 새겨들어야겠죠.”
놀랍게도 배우 이정은이 받는 혹평도 있다. 매 작품마다 작은 역할이라도 자신의 몫 그 이상을 해왔던 배우지만, 쏟아지는 호평 중에서도 단 하나의 혹평이 눈에 띄기 마련. ‘평범한 연기를 못한다’는 평가는 그에게 도전 의식을 불태우는 한 마디였다.
영화 ‘기생충’,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까지’ 대한민국 최고 대세 배우로 떠오른 이정은이 영화 ‘내가 죽던 날’로 돌아온다. 그는 대사 없이 감정을 전달해야 하는 어렵고도 새로운 도전을 펼친다.
9일 오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정은은 자신을 향한 호평과 관련해 “예전엔 좋은 것만 봤는데 요즘에는 나쁜 것도 눈에 많이 띄더라”며 겸손함을 보였다.
오는 12일 개봉하는 ‘내가 죽던 날’은 유서 한 장만 남긴 채 절벽 끝으로 사라진 소녀와 삶의 벼랑 끝에서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내민 무언의 목격자까지 살아남기 위한 그들 각자의 선택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에서 이정은은 소녀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무언의 목격자 순천댁 역을 맡았다. 불의의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캐릭터로 대사 없이 표정과 눈빛만으로 감정을 전달한다. 러닝타임 내내 말 한마디 없다가 극 말미 몇 마디의 대사만 쇳소리로 전달한다.
“(대사가 없는 역할이)찍고 있는 동안에는 부담이 됐죠. 영화의 대본도 흥미로웠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날 대사가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로 무언가를 설명하지 않으면 배우로서 또 어떨까 궁금했어요. 그런 생각이 들었을 찰나에 대본이 왔죠. 실험을 해보니 재미있는 작업이었어요.”
목소리를 잃은 순천댁 역할이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킨 것도 있지만, 영화가 주는 궁극적인 메시지 또한 이정은의 마음을 움직였다.
“요즘은 속도가 빠르고 직선적인 작품들이 유행을 많이 하잖아요. 울고 터뜨리면 좋은 연기라고 평가 받지만, 삶은 실제로 그렇지 않아요. 결정이 느린 것에 대해 큰 매력을 느꼈고, 어떤 배우들이 하게 될지 궁금했어요. 압박감에 놓여있는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게 쉽지 않아요. 사건 위주로 보는 게 아니라 사건 뒤의 심리, 인물의 마음을 보는 게 중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내면의 아픔이 있는 여성들이 연대하는 ‘내가 죽던 날’에 출연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김혜수의 영향이 가장 컸다. 2000년대 초반 연극을 할 때부터 인연이 있었던 두 사람은 이번 영화를 통해 동료 그 이상의 우정을 쌓았다.
“오래 전부터 김혜수를 알고 있었어요. 스타인데, 친숙한 자리에서 만났죠. 계속 변화하며 성장하는 배우 같아요. 비슷한 나이 또래인데, 기사를 보면 저 사람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잖아요. 이 영화를 보면 힘든 과정을 통과한 얼굴이 있더라고요. ‘혜수씨 정말 배우 얼굴 같다’고 했어요. 출연 결정에 김혜수의 영향이 정말 컸어요. 한번 쓱 오면 고개가 돌아가게끔 광이 나요. 나에겐 스타고, 여신같은 사람이죠. 꿈 속의 요정 같아요. 옆에 있으면 지금도 신기해요.”
데뷔 때부터 톱스타였던 김혜수는 ‘연예인들의 연예인’이다. 오랜 무명기간을 거친 이정은과의 행보와는 확연히 다르다. 공통분모가 작은 두 사람은 어떻게 연대를 쌓을 수 있었을까.
“김혜수는 정말 진솔해요. (김혜수의)동생과 작업을 많이 했는데, 그때마다 무대를 찾아와서 응원하더라고요. 남을 추천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가정은 어렵지만 재능이 반짝이는 젊은 배우들을 자기가 아는 감독이나 제작자에게 소개해줘요. 정말 품이 넓어요. 아무 연고도 없고, 지인과 학연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죠. 연대라는 게 그런 것 같다. 사회에서 어떤 척도로 생각하는 학력이나 연고 없이도 친구가 될 수 있고 마음을 실어줄 수 있어요. 그런 게 필요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거든요. 여성만 연대하는 게 아니라 남성과도 연대할 수 있죠. 공평하게 가는 것이 연대의 힘이 되지 않을까요.”
2년 사이 이정은의 위치는 많이 달라졌다. 영화 ‘기생충’을 시작으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한 번 다녀왔습니다’ 등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오며 대중이 ‘믿고 보는 배우’가 됐다. 달라진 위상에 이정은은 “되게 부담스럽더라”며 웃었다.
“아무래도 찾아주시는 데가 많아요. 매니저랑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데 ‘실력도 별로 없는데 거품만 많이 껴서 힘들어 죽겠다’로 말했어요.(웃음) 어쨌든 연기를 좋아하고,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아지는 건 배우에게 특혜이고 행운이라 생각해요. 그만큼 책임감이 뒤따라서 열심히 해야겠다 싶어요.”
인지도가 높아지고, 대중의 기대치가 올라가는 만큼 책임감이 많이 뒤따르지만 가장 중요한 건 ‘건강’이었다. 한해에 3~4편의 작품을 출연 중인 그는 체력에도 많은 부담을 느낀다고.
“잠을 많이 못자죠 아무래도. 정말 이 영화 찍을 때가 ‘내가 죽던 날’ 같은 느낌이었어요.(웃음) 제가 웬만한 배우보다 체력이 좋아서 잘 안 지치는데, 이 영화를 찍을 때는 많이 졸면서 이동했어요. 그래도 가장 바쁠 때 정신은 맑아지더라고요. 잠은 부족했지만 어떻게든 책임감을 가지고 해야 했거든요. 사실 이때 경험을 통해 겹쳐서 작품을 출연 안 하려고 노력하게 된 계기이기도 해요.”
작품 활동 외에도 광고계에서도 활약 중이다. ‘기생충’ 이후로 광고를 여러 편 찍어 ‘광고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송강호 선배님이 자꾸 저보고 ‘너 돈 많이 벌었겠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기생충’ 문광 이미지로 파생되는 광고들이 엄청 들어왔어요. 봉준호 감독님한테 몇 퍼센트를 드려야 하나 싶어요.(웃음) 어느 기회에 맛있는 걸 사드려야 하는지 고민 중이죠. 아직도 조금 거두고 있어요.”
이정은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누구보다 기쁜 사람은 어머니다.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최근 작품은 KBS 2TV 주말드라마 ‘한 번 다녀왔습니다’였다. 이정은은 “어머니가 곱게 입고 나와서 남한테 사랑받는 역으로 나오는 걸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제가 나오는 것만 보세요.(웃음) 최근 출연했던 주말 드라마도 엄청 보시고 어느 날은 갔는데 (그 작품을) 5번씩 보시더라고요. 낙이 없으시니까 다시 보나봐요. ‘몸빼’를 입고 검은 칠을 하면 별로 보고싶지 않아 하세요. ‘내가 죽던 날’도 별로 안 좋아하셨어요. ‘검은 칠을 하고 나오는 건 생각해볼게’ 하시더라고요. ‘말도 못하는데 뭘 보러 가냐’고도 하시고. 어머니는 저에게 어디에서든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누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남을 업신여기지 말고 존중하라고 항상 이야기 하세요.”
‘기생충’ 이후 할리우드에서 러브콜을 받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잠시 중단됐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자연스럽게 일이 중단이 됐는데, 언젠가 기회가 오겠죠. 준비를 해야할 것 같아요. 현장에서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데, 영어를 못해요. 개인적으로 공부를 계속 하고 있어요. 할리우드 생각을 했다가 한국이 콘텐츠가 더 좋아지고 하니 굳이 나가야 하나 생각도 들어요. 어떤 분은 제가 얼굴이 중국계처럼 보인다고 하던데, 중국에서 활동하지 않을까요.(웃음)” /이혜리기자 hyer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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