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11월5일, 쉰을 갓 넘은 수전 앤서니와 그의 여동생 세 명이 대통령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뉴욕 로체스터의 투표장에 나타났다. 당시 여성에게는 참정권이 없었지만 이들은 투표를 강행했다. 이들의 투표 행위에 화가 난 한 남성이 그를 고발했고 재판부는 “여성 투표는 불법”이라며 10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앤서니는 사망할 때까지 끝내 벌금을 내지 않았다. 여성 참정권을 향한 앤서니의 노력은 평생 이어졌고 결국 법으로 허용됐다.
앤서니는 1820년 매사추세츠주에서 면직물 제조업을 하던 퀘이커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뉴욕으로 이사해 아버지가 설립한 학교에서 교육받은 그는 32세 때까지 여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노예제 폐지와 금주 캠페인 등 사회운동에 헌신한다. 1850년대 들어서는 여성 권리 쟁취를 위한 연설과 저술활동에 본격 나서면서 여성운동가로 자리를 굳힌다. 1868년에는 평생 동지인 엘리자베스 스탠턴과 함께 주간지 ‘더 레볼루션(혁명)’을 발간했고 뉴욕여성근로협회를 조직해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임금을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1900년대 들어 ‘여성참정권협회’ 등을 통해 맹렬한 활동을 펼치던 앤서니는 1906년 3월13일 염원이던 여성 참정권을 얻어내지 못한 채 삶을 마감했다.
그의 꿈은 사후 14년 만에 이뤄졌다. 여성에게 참정권을 허용하는 내용의 ‘수정헌법 제19조’가 1920년 8월18일 비준됐다. 이 법은 그의 노력을 담아 ‘수전 앤서니 조항’이라고 불린다. 미 정부는 1979년 ‘여성 참정권의 대모’인 그의 초상이 새겨진 기념주화를 발행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올 8월 “앤서니의 벌금형을 사면하겠다”고 밝혔지만 그의 노력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며 역효과만 봤다.
미국 대선에서 카멀라 해리스가 차기 부통령에 당선된 후 로체스터의 앤서니 묘지에 헌화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그의 희생이 있었기에 첫 여성 부통령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소셜미디어에서는 해리스와 앤서니의 사진을 함께 담은 게시물이 올라오고 있다. 자신의 노력이 세상의 변혁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며 미소 짓고 있을 앤서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김영기 논설위원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