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전 세계가 다시 봉쇄(록다운)되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하고 있다면서 올해 800억달러(약 88조4,000억원)에 달하는 현금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개발이 가시화하고 있지만 코로나19 확산세가 가팔라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미 경제매체 CNBC와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손 회장은 17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주최의 딜북 콘퍼런스 화상연설에서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세계가 문을 닫을 경우 일어날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하기 위해 “약 800억달러의 현금을 손에 쥐고 있다”고 밝혔다. 당초 소프트뱅크그룹은 올해 약 400억달러의 자산 매각을 목표로 잡았지만 코로나19 비상사태 발생에 대비한 유동성 확보를 위해 800억달러의 자산을 매각했다.
최근 백신 개발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지만 당장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게 손 회장의 우려다. 그는 “앞으로 두세 달 안에 재앙이 일어날 수 있다”면서 “코로나19 백신이 오고 있지만 그 안에 벌어질 일을 누가 알겠느냐”고 반문했다.
실제로 이날 프랑스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자가 유럽에서 처음으로 200만명을 넘어서는 등 전 세계 코로나19 확산세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도 이날 한 온라인 토론에서 최근의 코로나19 감염률 증가세가 단기적으로 중대한 하방 리스크라며 미국 경제가 코로나19 대유행 전으로 돌아가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고 우려했다. 그는 미 제약사 화이자와 모더나가 잇따라 코로나19 백신 임상시험에서 높은 예방 효과를 보였다고 발표한 데 대해 “중기적으로 틀림없이 좋은 뉴스”라면서도 “바이러스가 지금 빠른 속도로 퍼지는 가운데 앞으로 몇 달은 매우 힘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손 회장의 공격적인 자산매각도 이 때문이다. 소프트뱅크그룹은 올해 들어 미 통신사 스프린트와 합병한 T모바일 지분 약 200억달러어치를 팔았고 1조2,500억엔(약 13조2,700억원) 규모의 중국 알리바바 주식도 매각했다. 또 영국 반도체 설계업체 암(ARM)홀딩스를 미국 엔비디아에 최대 400억달러에 매각하기로 했다. 손 회장은 “시장이 폭락할 경우 저평가된 자산을 매입하거나 비전펀드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확대하는 데 이 자금을 활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스타트업) 사냥꾼’을 자처하는 손 회장은 코로나19 사태로 인공지능(AI) 기업의 가치가 더욱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위워크 투자 실패로 쓴맛을 봤지만 성장성이 유망한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이어나가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소프트뱅크그룹은 AI를 활용해 구매자와 판매자를 연결하는 중국 온라인 부동산 업체 KE홀딩스에 13억5,000만달러를 투자해 대박을 쳤다. 블룸버그는 올해 8월 미 증시 상장 직후 이 기업의 주가가 치솟으면서 소프트뱅크그룹이 확보한 지분가치가지난 9월 말 기준 64억달러로 치솟았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손 회장의 자산매각 행보가 코로나19 대응보다 소프트뱅크의 자진 상장폐지를 위한 것이라는 분석을 제기한다. 손 회장은 소프트뱅크 지분 3%를 확보해 주요주주로 참여한 미국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의 경영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데 비상장사 전환을 위한 지분 매입에 약 1,000억달러의 현금이 필요한 것으로 전해졌다. CNBC는 손 회장이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보도한 소프트뱅크그룹의 자진 상장폐지 전망에 대해 이날 두 차례나 언급을 거부했다고 전했다.
/김기혁기자 coldmeta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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