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영 통일부장관이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북한에 백신 나눔과 경제협력을 제안하며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북한은 무반응으로 일관하고 있고 미국 전문가들은 이같은 제안이 “가능성이 없다”고 일축했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가 약 1년 반밖에 안 남은 데다가 바이든 행정부에 대북 강경파들이 대거 입각할 것으로 예상되자 통일부가 무리하게 정책을 추진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에반스 리비어 전 국무부 동아태 수석차관보는 23일 자유아시아방송(RFA)를 통해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치료제가 개발되고 비핵화 협상의 진전도 있고, 그런 과정에서 대북 제재의 유연성이 만들어지는 기회가 생길 수 있다”고 한 이 장관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에반스 수석차관보는 “북한 지도자의 모든 발언이 북한 안보를 위해 핵무기가 매우 중요하다는 주장만을 재확인하고 있다”며 “비핵화 협상에 대한 진전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그는 “차기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과 원칙에 입각한 대화에 대해 분명히 열려있지만, 이러한 대화 역시 비핵화에 대한 굳은 약속, 강한 동맹관계, 무력 도발과 핵미사일 실험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차기 바이든 행정부의 태도는 북한의 환심을 사기 어렵다. 이 장관이 묘사한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이 장관이 현재 남북관계 경색의 원인 중 하나로 코로나19를 들며 확산세가 진정될 경우 대화가 재개될 수 있다고 본 반면, 리비어 수석차관보는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의지 표명 없이 대화가 있을 수 없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 장관은 남북경협 재개 가능성을 언급한 데다가 서울·평양 상주대표부 설치까지 주장하며 연일 ‘대북 평화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이 장관은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국회 토론회’에서 남북의 상시적 연락선을 재복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기존 연락사무소 재개를 넘어 서울과 평양에 상주 대표부를 만들고 신의주와 나진·선봉연락소까지 추가로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도 내놓았다.
그는 “무너진 연락사무소를 적대의 역사에 남겨두지 않고 더 큰 평화로 다시 세워나가야 한다”며 “서울·평양 대표부를 비롯해 개성·신의주·나진·선봉 지역에 연락소와 무역대표부 설치도 소망해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새로운 남북 관계의 변화는 바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통신 재개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말씀드린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는 북한이 파괴한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대신해 더 발전된 형태의 연락기구를 설치하자는 주장이다. 남북은 지난 2018년 4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에 이뤄진 4·27 판문점 선언을 통해 북한 개성 지역에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설치해 운영해왔으나 지난 6월 북한이 대북전단(삐라) 살포에 대응해 공동연락사무소 청사를 폭파했다.
이 장관은 토론회 직후 곧바로 경제인과의 오찬 간담회로 자리를 옮겨 ‘남북경협 재개’ 의사를 내비쳤다. 그는 2018년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 당시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방북했던 기업인들로부터 남북경협에 대한 의견을 듣겠다는 취지로 삼성·SK·LG·현대차그룹 사장단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오찬을 가졌다. 이 장관은 오찬 간담회에서 “앞으로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고 비핵화 협상에 진전이 있고 이런 과정에서 대북 제재의 유연성이 만들어지는 기회가 생길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북한에 대해 “내년 1월로 예정된 제8차 당 대회를 계기로 경제 발전을 지금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우선적 목표로 둘 것”이라고 전망했다. “올해 코로나19, 제재, 자연재해라는 삼중고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던 북한이 내년에는 경제적 성과 창출에 훨씬 더 집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다만 이같은 이 장관의 행보에 북한은 무시로 일관하고 있다. 이 장관이 남북경협 재개 가능성을 띄운 다음날인 24일 북한은 노동신문을 통해 “비상방역전을 계속 강도높이 전개하고 있다”고 말할 뿐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지난 18일 이 장관이 KBS 뉴스에 출연해 “(코로나 백신이) 좀 부족하더라도 부족할 때 함께 나누는 것이 더 진짜로 나누는 거라고 생각한다”며 남북 간 코로나 백신 공유를 제안한 다음날에도 북한은 “없어도 살 수 있는 물자 때문에 국경 밖을 넘보다가 자식들을 죽이겠는가 아니면 버텨 견디면서 자식들을 살리겠는가 하는 운명적인 선택 앞에 서 있다”고 밝혔다. 외부 지원을 받지 않겠다는 입장을 재차 확인한 셈이다.
이같은 이 장관이 행보를 서두르는 것은 문재인 정권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에선 ‘강경파’들이 대북정책의 키를 잡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분석관을 지낸 수 김 랜드연구소 정책분석관은 23일 RFA에서 “한국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가 2022년에 끝나고 곧 차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이 현재 북한과의 관여에 진전이 있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이는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차기 행정부 첫 국무장관으로 토니 블링컨 전 국무부 부장관을 내정하는 등 상황과 관련된다. 블링컨 전 국무부 부장관은 북한을 “최악의 수용소 국가”로 표현하는 등 북한 인권 문제를 중하는 강경파로 분류된다. 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식의 ‘탑다운(Top-down)’ 협상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차기 미국 행정부가 대북 강경책을 펼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 장관이 그 전에 대북 협상의 가능성을 틔워보고자 애쓰고 있다는 분석이다.
아울러 수 김 정책분석관은 “대북 정책의 유연성이 생길 수 있다”는 이 장관의 발언에 대해 “김정은 정권에 대한 일치된(cohesive) 정책이나 전략보다는 북한에 대해 ‘무엇이든 해내야 한다’는 근시안적 고려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김인엽기자 insid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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